몇 번의 거절과 무응답 끝에 드디어 한 원룸을 보러 갈 기회가 생겼다. 우리나라와 달리 프랑스에서는 집을 단체로 보러 간다. 집주인이 날짜와 시간을 정해서 알리면, 한날한시에 입주를 원하는 예비세입자들이 모여 순서대로 방을 둘러보는 방식이다. 그리고 바로 그날 집주인은 서류를 받고 세입자를 결정한다. 마치 집 구하는 과정이 하나의 오디션 같다.
이제는 정말 절박한 심정이 되었다. 이 오디션을 어떻게든 통과해야만 했다. 그래서 필수적으로 필요한 서류들 외에 나를 어필할 수 있는 모든 서류를 챙겨 갔다. 통장 잔액증명서는 물론이고 한-불 워킹홀리데이 협정서, 그리고 한국에 있는 아빠라도 보증인으로 내세우기 위해 아빠의 여권 사본과 통장 잔액증명서까지 챙겨 갔다. 봐라, 내가 이렇게 월세를 잘 낼 수 있는 사람이다!를 어필하기 위해.
거기에 더해 집주인에게 편지까지 썼다. 저는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통해 프랑스에서 건전한 일을 할 것이고 대학교에서 4년 동안 기숙사 생활을 한 경험이 있으며 흡연을 하지 않고 반려동물도 키우지 않습니다…… 구구절절, 내가 이렇게 깔끔하게 방을 잘 쓸 수 있는 사람이다!를 어필.
이렇게 만반의 준비를 하고 약속 장소로 나갔는데 웬걸, 집 앞에 사람들이 새떼처럼 모여 있었다. 전부 입주를 희망해 집을 보러 온 사람들이었다. 한눈에 봐도 아시아인은 나밖에 없었다. 절망적인 기분이 들었다.
조금 민망한 위치의 샤워부스
방을 둘러볼 수 있는 시간은 단 5분이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집을 볼 때처럼 샤워기 물도 틀어보고, 변기물도 내려볼 여유는 없었다. 들어가자마자 방 한가운데 서 있는 투명한 샤워부스가 눈에 걸렸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내 한 몸 뉘일 수 있는 집이기만 하면 됐다. 월세도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정도였다. 나는 이 집에 너무 들어가고 싶었다.
짧은 집 구경을 마치고 나와 집주인에게 서류를 건네며 말했다. 무슈, 오늘은 제 생일이랍니다. 저에게 생일선물처럼 이 집이 주어진다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것 같아요. 저는 정말 집을 깔끔하게 쓸 수 있고……
알겠으니까 이제 그만 가세요. 다른 사람들도 집을 봐야 해요.
나의 말을 끊고 집주인은 냉랭하게 말했다. 괜히 마지막에 나쁜 인상을 남긴 것 같아 어깨가 축 처졌다. 적당히 할 걸, 또 망했구나. 또 기회를 놓쳐버렸구나! 대체 언제쯤 집을 구할 수 있을까 낙심하며 론 강을 하염없이 걸었다.
몇 시간 후, 띵동- 문자가 왔다.
집주인이었다. 입주를 승인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니까 9명의 쟁쟁한(?) 세입자 후보들 중에서 그가 나를 선택한 것이다! 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기쁜 마음에 프랑스친구에게 내가 이해한 게 맞냐고, 정말 내가 그 집에 들어갈 수 있는 거냐고 몇 번이나 물었고 론 강 앞에서 펄쩍펄쩍 뛰었다. 11월 11일, 그날은 정말 나의 생일이었고 타지에서 어렵게 구한 집은 그 어떤 생일선물보다 값졌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리옹은 그 어떤 도시보다 아름다웠다.
며칠 후 계약을 하러 갔을 때 집주인에게 많은 사람들 중 왜 나를 선택했는지 넌지시 물어보았다. 궁금했다. 모두가 나를 거절했는데, 그는 무엇을 믿고 나를 받아줬는지. 그는 나의 편지를 읽고 내가 방을 깨끗하게 잘 쓸 것 같아 선택했다고 했다. 내 전략이 통한 셈이었다. 그 전략엔 간절함과 절박함도 들어 있었다.
훗날 집주인이 이탈리아 출신의 이민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혹시 그는 나에게서 십수 년 전 자신의 모습을 보았던 걸까? 나에게 집을 허락한 것이 외지에 첫 발을 내딛는 사람에게 내미는 도움의 손길이었다고 생각하면 지나친 해석일까. 무뚝뚝한 그는 나에게 많은 말을 건네지 않았지만 왠지 그가 가깝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운이 좋게도 리옹에 온 지 일주일 만에 집을 구할 수 있었다. 초심자의 행운이라던가. 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다. 만약 초심자의 행운이 있다면, 그것은 단순한 행운이 아니라 누군가 초심자에게 건네는 따뜻한 마음이라는 것을. 다나가 내게 그랬듯, 집주인이 선뜻 나를 선택했듯 말이다. 나 또한 초심자에게 행운을 건네줄 수 있는 사람이 되리라 깊이 다짐하며 감사한 마음으로 리옹에서의 삶을 시작했다. 남은 미션은 일자리를 구하는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