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세화는 조용한 동네다. 조그마한 만을 끼고 그 사이로 바닷물이 드나들었다. 까만 화강암들이 층층이 쌓여 언덕을 이루고 곱고 하얀 모래가 흩뿌려져 있다. 두꺼운 회색 콘크리트로 도로와 바다의 경계를 나누고 있었는데 잘 나가다 뚝 끊겨 있었다. 그 끊어진 공간에는 예산을 확보하지 못해 마무리 짓지 못한 공사현장에나 있을법한 속이 빈 플라스틱 드럼통 몇 개가 줄을 달고 이어져 있었다. 주황색과 흰색의 줄무늬가 카페에서 풍경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의 사진에 옥에 티처럼 돋보였다. 다행히 콘크리트 담 위에 앉으면 오로지 바다만 보였다. 해가 지도록 바다만 보고 있어도 될 정도로 감동적인 풍경이었다. 쳐다만 보고 있어도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좁은 해안도로가 해변을 따라 이어져 있었고 그 주변으로 있는 카페나 편의점에 관광객들이 수시로 드나들었다. 몇 번이나 주차되었던 차량이 바뀌어 나가도 그 자리에 앉아 가만히 풍경을 바라보았다.
편의점을 지나 카페가 딸린 건물의 1층이 우리 방이었다. 맞은편에도 사진을 찍으면 예쁘게 나온다는 유명한 숙소가 있었다. 이왕이면 제주다운 숙소에서 지내보고 싶었지만 뒤늦게 예약한 우리에게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비싸고 예쁜 숙소는 이미 예약이 풀이었고 좁고 평범한 방은 남아있었다. 그 평범한 방 중에 해변이 가장 가까운 이곳을 선택했다. 1박에 6만 원밖에 하지 않는, 부엌 딸린 가성비 좋은 원룸이었다. 잠만 자야 하는 곳이면 어떡하나 걱정되었지만 셋이 지내기에는 충분했다. 이불에서 나는 향기와 방안의 소소한 실내장식, 주인 할아버지의 자부심 느껴지는 세세한 설명에 마음이 놓였다. 깔끔하게 관리된 방의 식기들과 매일 채워주는 수건의 뽀송함 또한 나를 안심시켰다.
한참 물놀이를 하고 도저히 젖은 빨래를 내버려 둘 수 없겠다 싶어 주인 할아버지께 여쭤봤을 때 뽀송뽀송한 수건의 연유를 알게 되었다. 동네 곳곳에 세탁방이 있었는데 요즘 숙박업소에는 집에서 이불 빨래를 직접 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 대형 세탁기와 건조기가 있는 곳에 맡겨서 운영하는 거였다. 소량의 빨래 더미를 들고 세탁 가게에 들어갔다가 거절당하고 코인 세탁실에 가서야 깨달았다. 진한 섬유유연제의 향기와 바짝 말려 뽀송뽀송한 수건의 정체가 여기 있는 대형 건조기 덕분이라는 것을.
방을 나오면 바로 주차장이었고 옆방은 주인 내외분이 지내시는듯했다. 그 방을 지나 다섯 칸 남짓 되는 계단을 내려가면 자동차가 주차된 주차장 공간이 나왔다. 그곳을 지나 왼쪽으로 가면 해변이 나오고 오른쪽으로 가면 작은 초등학교가 나온다. 사이사이 골목마다 숙소와 식당과 가게들이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걸어가다 나오는 초등학교는 작은 동네에 비해 다닐만한 애들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커 보였다. 그늘이라고는 한 점 없는 운동장에서 초록 잔디만이 빼곡하게 자라고 있었다. 잔디를 지나 가장자리의 담벼락 근처에는 커다란 고목 하나만이 시원한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여느 때라면 학교로 달려갈 아이였는데 내리쬐는 햇볕에 엄두를 내지 못해서인지 아이는 운동장으로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지나쳤다.
초등학교를 따라 버스가 다니는 도로가 나오는데 거기서 버스를 타면 제주도의 다른 곳을 갈 수 있었다. 뚜벅이 여행자였던 우리는 버스 정류장의 위치 파악하고 점심을 먹기로 한 백반집으로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백반 가게는 휴무였다.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이런 예측할 수 없는 변수들이 여행의 생기를 불어넣는 게 아닐까. 어젯밤에 지나가면서 봤던 제주 흑돼지가 생각났다. 일반 백반에서 제주 흑돼지로 메뉴가 업그레이드되었다. 이는 필시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거라는 생각마저 든다. 골목 안쪽에 있던 백반집에서 해변을 향해 걸었다. 멀지 않은 거리에 바다가 보일 듯 말 듯 한 위치에 있던 흑돼지 가게를 찾았다. 밤에는 손님으로 북적이던 가게였는데 점심때라 조용하다. 흑돼지 오겹살 3인분을 시키고 더위를 날릴 시원한 맥주도 한 병 시켰다. 양파 겉절이, 샐러드, 채소까지는 어느 고깃집을 가든 비슷한 상차림이었다. 오이와 미역, 톳이 들어간 냉국은 별미였는데, 짭짤한 듯 새콤함이 입맛을 돋웠다. 오도독 오도독 씹히는 톳의 식감도 재밌었다. 한 접시에 나온 3인분의 오겹살을 불판에 올려두고 고기가 익기를 기다리고 기다렸다. 비계 부분이 노릇하게 익어 모서리 부분이 바삭해진 고기를 젓가락으로 집어 진한 멸치젓에 듬뿍 찍어 먹었다. 하얀 거품이 올라오는 맥주가 든 유리컵 2개와 물컵 하나가 마주 부딪히며 찰랑 소리를 냈다. ‘인생 뭐 있어, 이게 행복이지’라는 상투적인 문장이 마음속에 떠올랐다. 살아가면서도 생각지 못한 상황은 종종 발생한다. 그럴 때마다 오늘처럼 점심 메뉴를 바꾸듯이 쉽게 생각하면 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더 좋은 상황이 올 수도 있는데 놓친 상황만 생각하다가 쫄쫄 굶는 현실을 맞이하지는 말자며 얼른 쌀밥에 된장을 넣어 슥슥 비벼 먹었다.
후식으로 커피를 마시러 눈에 보이는 카페로 들어갔다. 기대가 없어서였는지 들어서자마자 통창으로 보이는 바다 조망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내부는 하얀 바탕에 파란색 포인트로 꾸며져 산토리니섬을 연상시키는 시원한 청량감을 풍겼다. 포인트는 파란 테두리의 창틀이었는데 그것이 마치 직사각형 액자 같은 효과를 내고 있었다. 바 형식의 높은 스탠드 체어 5개가 나란히 들어갈 만큼의 너비였다. 그 안에 펼쳐지는 바다 풍경이 기가 막혔다. 아래서, 가까이서 보던 바다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나무만 보고 있다가 숲 전체를 보고 있는 기분이랄까. 저 멀리 끝도 없이 펼쳐진 바다와 하늘과 맞닿아 있는 수평선이 아득했다. 에메랄드 빛깔의 바다는 하얀 파도를 일렁이며 쉼 없이 들이치고 있었다. 부서지는 파도에 몇 번이고 쓰러지는 서퍼들을 보며 나도 저 바다 위에 떠 있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조용하던 동네가 우리가 떠나는 마지막 날에는 활기를 띠었다. 우리가 머무는 내내 운영하지 않을 것처럼 닫혀있던 세화 장터에 5일 장이 열렸다. 거짓말처럼 많은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밀가루를 튀기는 기름 냄새, 옥수수 찌는 냄새, 쿰쿰한 젓갈 냄새까지 다양한 먹을 것들의 냄새가 풍겼다. 트로트 노래와 고객을 유치하는 상인의 목소리도 울려 퍼졌다. 어제까지만 해도 휑하던 그 장소가 이렇게 활기찬 곳이라니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비행기를 타러 가기 전에 간단한 요깃거리나 사러 갔다가 떠나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세화 시장에서 삶을 향한 활기, 사람의 온기, 살아 있는 것의 생동감 같은 것을 느꼈다. 이런 분위기는 복작거리는 장소에서만 느낄 수 있는, 오직 사람에 의해서만 만들어지는 장면이라 생각했다. 휴식과 자유를 찾아 떠나온 여행에서도 사람들 속에 어울려 있을 때 안도감을 느낀다. 낯선 곳에서 만난 사람과의 교류에서 여행의 의미를 깨닫기도 한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고 서로의 온기를 느끼면서 살아가는 사회적 동물이었다. 코로나로 잠시 잊고 있었던 온정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