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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나무 Feb 11. 2021

봄동과 카스텔라

  봄동이란 이름에선 단아함이 느껴진다. 진초록에 노란 속잎, 꽃처럼 활짝 핀 모양도 아담하니 예쁘다. 도톰하고도 연한 잎은 아삭하고 달큼한 맛을 지녔다. 겨울의 추위가 물러갈 즈음이면 눈앞에 어른대는 상큼한 봄동 겉절이.

     

  비탈길 눈도 녹아 모처럼 차를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읍내에 다녀올까?”

  동생에게 말해보았다.

  “뭐하게.”

  반응이 시원찮았다.

  “뭐, 곧 설날이니까 마트에 가볼까 싶어서. 봄동이 나왔을 텐데.”

  내 말에 동생은 묵묵부답 시큰둥한 표정이 되었다. 외부에 나가는 것이 내키지 않는 건지, 움직이기가 귀찮은 건지 알 수 없었다. 기다려 볼 일이었다. 갑작스러운 제안엔 주로 첫 반응이 그랬다. 차 마실래? 하고 어쩌다 부를 때도 아니, 우선은 거절부터 하는 동생이다. 그래도 나는 동생 몫까지 차를 우려 찻잔에 담아 놓는다. 대개는 차가 식기 전 무슨 차야? 하며 건너온다.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우리 자매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계절성인지 호르몬의 변화인지 요즘 동생 상태가 좀 별로다. 둘만 사는 세상, 한 사람의 기분은 금방 전염이 된다. 말을 꺼낸 나도 옷 걸쳐 입고 마스크 쓰고 나갈 생각을 하니 귀찮아졌다. 접자고 말하려는 순간 동생이 입을 열었다.    

  “그럼 난 카스텔라.”

  

  그렇게 해서 오랜만에 나선 읍내 나들이. 작년 연말 이후 처음이니 두 달여 만이었다. 길 사정이 좋지 않은 겨울에 그 정도 칩거는 보통이다. 둘 다 외출을 반기는 편이 아니라 답답할 건 없었고, 겨울나기 준비를 미리 해두기에 아쉬울 것도 없었다. 그러다 입춘이 지난 즈음이면 슬며시 마음이 동한다. 세상 구경이 하고 싶기도 하고 뭔가 신선한 것이 먹고 싶어 지기도 하는 것이다. 읍내 정도만 다녀와도 그 두 가지 헛헛증이 채워진다. 집에서 차로 이십 분이 채 걸리지 않는 읍내지만 일탈의 기분을 내기엔 충분하다. 읍내엔 신발가게, 철물점, 의원, 약국, 커피숍, 편의점, 분식집, 떡집, 빵가게 같은 상점이 이차선 도로를 사이에 두고 모여 있다. 도시로 치면 한 블록 정도의 상점가다.

     

  마트부터 들렀다. 명절이 이틀 남았는데도 손님이 별로 없었다. 5인 이상 모임 금지 조치로 도시인들의 시골 방문이 확실히 자제될 모양이었다. 바구니를 들고 입구의 냉장 코너부터 돌았다. 황금팽이버섯, 콩나물, 두부를 담았다. 이번 설날 떡국은 향이 독특한 황금팽이버섯을 넣어 끓여볼 생각이었다. 콩나물은 살 예정에 없었지만 보는 순간 집어 들게 되었다. 매큼하게 끓인 콩나물국을 동생은 무척 좋아한다. 좀 더 안으로 들어가니 콜라비가 보였다. 우주선 같이 생긴 짙은 보라색 채소. 요즘이 제철이라 한창 맛이 있을 거였다. 콜라비도 세 개 담았다. 작년 봄 콜라비를 처음 맛보고는 아주 반해버렸다. 껍질을 벗긴 뒤 얇게 잘라 그냥 먹으면 된다. 순무와 비슷하면서도 더 달큼하고 시원한 맛이 생채소를 좋아하는 내겐 과일보다 나았다. 되도록 천천히 걸으며 나는 눈앞의 상품에 골고루 눈길을 주었다. 잘 차려진 갖가지 물품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새로웠다.  

  “뭐해?”

  장바구니를 든 동생이 다가왔다. 동생 장바구니엔 우유와 두부, 라면이 들어 있었다. 동생이 마트에서 사는 물품은 주로 그 세 가지였다. 나는 대파와 무, 당근을 보고 있었다. 대파 한 단은 5890원, 무 한 개는 1980원, 당근은 100그램에 280원. 이 상점의 운영자는 숫자 8을 심리적으로 잘 활용하는 사람이구나 싶었다. 1990원은 이 천 원으로 여겨지는데 그보다 10원 적은 1980원은 천 원대의 물품이라는 기분이 들게 해 준다.

  “고민 중이야.”

  내가 말했다.

  “무슨 고민?”

  “이 중 누굴 데려갈까 하고.”

  내가 중얼거렸다. 대파나 당근 같은 걸 두고 고민한다는 건 흐뭇한 일이었다. 그만큼 별일 없는 지금의 자신을 즐기는 것이기도 했다. 동생은 기다려 줄 가치가 없다는 듯 몸을 돌려 계산대 쪽으로 이동했다. 대파는 포기하고 당근과 무를 담았다. 홀가분했다. 부담스러운 대파 한 단을 다듬고 씻을 번거로움이 사라졌다. 파는 텃밭에서 자랄 시기에 실컷 먹으면 된다. 마트를 한 바퀴 다 돌도록 정작 사려던 봄동은 보이지 않았다. 직원에게 물으니 입구에 놓인 허름한 종이 박스를 가리켰다. 벌써 철이 지난 것인지 시들해진 봄동이 박스에 얼마간 담겨 있었다. 실망스러웠지만 없는 것보단 나았다. 남은 걸 다 쓸어 모아 봉지에 담았다. 상태는 그래도 무게를 달아 가격을 매기니 무려 7600원. 어쨌든 그로써 마트의 장보기는 마쳤다. 다음은 동생이 원한 카스텔라.

  

  “좀 전 마트에서 어떤 아주머니가 내게 이상하게 굴었어.”

  동생과 나란히 걸어가며 내가 말했다. 장 본 건 차에 넣어 두고 빵집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마트는 상점가가 시작되기 전 공터 옆에 위치했고, 빵집은 상점들이 늘어선 거리를 거의 지나 끄트머리에 있었다.  

  “어쨌는데?”

  동생이 물었다.

  “달걀을 살까 보고 있었거든. 그런데 한 아주머니가 슬그머니 다가와 말을 건네는 거야. ‘유정란 있는데 살래요? 농장에서 왔어요.’ 하고. 무슨 암표 파는 사람처럼.”   

  봄동을 사기 전 달걀 코너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 검은 마스크를 쓴 육십 중반 정도의 아주머니였다. 마스크야 누구나 쓰고 있는 처지라 이상할 것 없었지만 내게 모종의 신호를 보내는 듯한 태도에 괜히 나까지 긴장이 되었다.    

  “그러니까 자기네 농장 유정란을 마트 측 모르게 언니에게 팔려고 했나 보네.”

  내 말을 들은 동생이 말했다.

  “그러게. 근데 행동하는 게 좀 어설펐어. 주변을 슬슬 살피는 것이 오히려 눈에 띄겠더라.”

  “사지 그랬어.”

  동생이 말했다.

  “어떻게 사. 그냥 고개만 젓고는 얼른 지나쳤지, 들킬까 봐. 그리고 난 유정란은 좀 무서워. 병아리가 나오면 어떡해. 그러다 달걀은 못 사고 나왔어. 넌 떡국에 달걀 푸는 거 좋아하는데.”

  “괜찮아. 요새 엄청 올랐다며. 가격 내리면 그때 사자. 지금은 카스텔라만 있으면 돼. 당장 먹고 싶은 건 그거니까.”

  동생이 말했다.

  “맞아 그것도 이상스러웠어. 갑자기 웬 카스텔라를 찾니? 안 먹던 거잖아.”

  뒤늦게 나는 물어보았다. 동생이 빵집에서 사는 건 대부분 식빵 종류였고, 카스텔라 사는 것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몰라. 그냥 생각이 났어. 그런데 말해놓고 나니 그때부터 정말 먹고 싶어 지더라.”

  어째 나까지 불현듯 카스텔라가 먹고 싶어 졌다. 위아래 짙은 갈색 선을 두른 폭신하고 노란 카스텔라의 구체적인 모양까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직사각형 예쁜 종이 상자에 낱개로 썰어져 얌전히 담겨 있던 카스텔라를 아버지에게 몇 번 사다 드린 기억이 있었다. 빵이나 과자 같은 건 입에도 대지 않는 아버지가 카스텔라만큼은 가끔 입가심으로 드셨다.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는 서울 부모님 집 근처의 파리바게트에서 내가 사던 그 카스텔라였다. 동생의 갑작스러운 카스텔라도 아버지의 카스텔라에서 기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며칠 전 남동생이 가족 단톡방에 설날 모임에 대한 아버지의 뜻을 전달했다.

  <아버지가 이번 설날엔 아무도 오지 말라고 합니다. 당일을 피해 따로 오는 것도 그만두고, 누구도 예외 없이 지키랍니다. 그러니 각자 집에서 평온한 명절 보내시길...ㅎ >

  원칙이 있다면 반드시 지키는 아버지였다. 넷 까지는 된다니까 둘 씩 따로 오면 되잖아, 하던 엄마의 바람은 허사가 되고 말았다. 엄마는 속상한 나머지 바이러스 자체를 의심하기도 했다. ‘내 주변엔 아무도 걸린 이가 없어. 정말 그런 게 있는 거 맞아? 명절에 자식들도 못 만나는 뭐 이런 이상한 세상이 다 있니.’ 어제도 전화로 그런 말을 했다.  

  “너무 썰렁하네. 가게들이 다 빈 것 같아.”

  약국과 세탁소, 분식집 앞을 지나며 동생이 말했다. 볕도 환하고 상점마다 불빛도 환한데 드나드는 사람이 없으니 뭔가 기분이 묘했다.

  “얼마 전에 하루키 단편 하나를 읽었는데 마치 그 세상 같다.”

  내가 말했다. 천천히 걸음을 내딛으며 나는 그 이야기를 동생에게 들려주었다.

     

평소 양복을 즐겨 입진 않지만 이따금 색다른 기분을 위해 양복 차림으로 외출을 하는 남자가 있다. 어느 하루도 그렇게 양복을 입고 나서려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에게서 어쩐지 께름칙하고도 낯선 기분을 느낀다. 그 뒤 지하 재즈바에서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술을 주문하고 책을 읽고 있던 그에게 한 번도 본 적 없는 여자가 나타나 느닷없이 원망을 퍼붓는 것이다. 당신은 삼 년 전 어느 물가에서 내 친구에게 아주 나쁜 짓을 했으니 부끄러워해야 한다. 남자는 허둥지둥 재즈바를 나와 지상으로 계단을 오르면서 두려움을 느낀다. 그 알 수 없는 여자의 말에 의해 전혀 기억에도 없는 그 일이 자신 속 어딘가에서 실제로 끌려 나올 것 같은 두려움이었다. 이윽고 계단을 다 오른 남자는 지금 자기 앞에 펼쳐진 세계가 자신이 알던 세상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내가 들려준 이야기를 듣고 동생이 물었다.

  “그게 끝이야, 이야기는. 근데 뭔가 상황이 비슷하지 않아. 우리도 색다른 기분을 위해서 외출을 했잖아. 그리고 마트에서 유정란을 은밀히 파는 사람을 만났지. 그 뒤 사람들이 사라진 텅 빈 거리를 걷게 된 거야. 내가 그 유정란을 샀어야 했는지도 몰라. 그럼 또 전혀 다른 세상으로 나가게 되지 않았을까.”

  “하여튼 이야기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엉뚱해. 그 작가는 그렇게 어디에도 속하는 게 싫은가. 요리도, 달리기도, 자기 관리도 잘하는 아주 현실적인 사람이라면서 왜 툭하면 그렇게 다른 세계를 넘보는 거야.”

  동생이 말했다.

  “왜 난 그 점이 좋은데. 읽다 보면 설득력이 있잖아. 겉은 그대로고 차원만 달라진 꽤 이상한 세계지만 그게 현실이기도 하지. 그런 은유가 모호한 현실을 생생히 구체화시키는 거고.  특히 난 그 문장들이 좋아. 책임을 다하면서도 온기가 있거든. 그래서 자칫 삭막할 풍경을 감싸주기도 하고.”

  내가 말했다. 푸른 차양을 드리운 빵집 앞에 우린 막 도착해 있었다.

  “난 눈에 보이는 그대로가 좋아. 그냥 단순한 거. 뭔가 있는 것처럼 위장을 해놓은 것일수록 알맹이는 별 거 없어. 세상사가 복잡하다지만 거슬러 올라가 보면 결국 점 하나라고.”

  동생이 말을 마치고 문 열림 버튼을 눌렀다. 푸른 테두리 속의 유리문이 스윽 열렸다. 안으로 들어서자 고소한 빵 냄새와 환한 불빛이 가득했다. 예쁘고 먹음직한 빵들은 저마다 단정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아무도 찾지 않아도 모두 제 역할을 담당하여 천 년 동안 그 자리에서 기다려 온 것만 같았다. 어서 와요. 카운터 안쪽에 하얀 마스크를 쓴 주인 할머니가 어둑한 주방을 배경으로 꼿꼿이 서 있었다. 실제로 인사말을 들은 건지, 마스크 속의 입이 움직여 말을 했을 거라고 내가 상상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여기 있네.”

  동생이 진열대 위로 손을 뻗었다. 세상을 거슬러 오르면 마지막에 남는다는 그 한 점처럼 노란 카스텔라가 동생의 손에 잡혔다.    

     


 

카스텔라와 봄동 김밥, 봄동 샐러드, 봄동 물김치

     

봄동 겉절이, 잡곡밥, 콩나물국, 김, 단호박수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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