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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의손 May 19. 2024

동생의 비밀과외

밤공부

 동생이 쭈뼛거리며 은영의 교실 문 앞에 서 있었다. 산으로 강으로 들개처럼 뛰며 놀기만 하던 동생이 입학한 첫날 교실에 찾아왔다는 것은 문제가 생겼음을 뜻했다. 동생은 은영을 보자 눈물을 글썽였다. 동생을 울린 아이를 찾아야 했다. 은영이 아무 말 없이 손을 잡고 교실 복도를 걸었다. 첫날이라 일찍 하교를 시켰는지 1학년 교실은 텅 비어 있었다. 초록색 칠판에는 하얀 분필로 이름이 커다랗게 적혀 있었다. '김ㅇㅇ' 세 글자가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볕에 반짝이고 있었다. 칠판을 보던 은영이 놀라며 물었다.

 "니 반장 된기가?"

 한숨을 쉬며 동생이 말했다.

 "아니"

은영이 칠판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건 뭔데"

 "선생님이 국어 시간에 공책에 이름을 적느라 카는데 나는 이름을 못 적는다 아이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동생의 얼굴이 붉어졌다. 국어 시간에 열 칸짜리 공책 한 바닥을 자기 이름으로 채우라고 했지만, 가만히 앉아 있으니 담임선생님이 칠판에 이름을 적어 주신 것이었다. 너무 부끄러워서 눈물이 나려는 걸 참았다고 했다. 집에 가서 연습하면 된다고 말하며 동생의 책가방을 싸 집으로 보냈다. 은영은 동생이 자기 이름도 못 쓰는 부끄러운 아이로 놔둘 수는 없었다.

 저녁을 먹고 동생과 열 칸 국어 공책을 두고 마주 앉았다. 은영이 '김ㅇㅇ' 세 글자를 공책에 적었다. 두 아이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사라졌다. 처음 잡아보는 연필과 한글이 쉽지 않았는지 공책에 쓰인 이름은 떨리고 있었다. 밤이 늦도록 동생은 방바닥에 엎드려 이름을 그렸다.

 다음날 학교에서 돌아온 은영이 동생의 공책을 보고 크게 웃었다.

 "그림을 그리 났네! 그리 났어. 야! 글자는 그림이 아이다"

동생이 조용히 눈을 흘기며 말했다.

"쓸 줄 모르는데 책을 보고 그리 야지. 다른 아들도 다 그리드라"

동생의 진지한 대답에 은영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다시 동생이 방바닥에 배를 깔고 누웠었다. 그날 밤도 글씨 특훈이 계속되었다. 

 동생의 학교생활에 적응이 되기 시작했을 때 또 한 번 위기가 닥쳤다. 바로 받아쓰기가 시작된 것이다. 아무렇지 않은 듯 보였지만 '50점' 많지도 적지도 않은 받아쓰기 점수는 그날 밤 동생을 잠 못 들게 하기 충분했다. 100점은 아니더라도 누가 봐도 부끄러운 점수는 받지 말아야 했다. 받아쓰기 열 문제가 가끔은 그 집을 평가하는 점수가 되기도 한다. 국어책을 들고 받아쓰기에 나올 법한 문장을 은영이 불렀다. 동생은 받아쓰기 공책에 더듬더듬 글씨를 적기 시작했다. 한바닥, 두 바닥 두 아이의 밤은 깊어져만 갔다. 틀리는 글자는 다시 연습을 시키는 은영에게 동생은 화를 냈다. 그러나 통하지 않았다. 동생의 받아쓰기 점수는 은영의 점수이기도 했다. 은영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라 얇팍한 투정 따위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한껏 화를 내는 동생을 보며 엄마가 말했다. 

 "진영이 니 또 50점 받을 수 있나? 빵점 받으면 우짤라고 그라노?"

동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연필을 쥔 손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국어책을 읽는 은영의 목소리가 문지방을 넘고 있었다. 달빛으로 가득한 마당은 두 아이의 그림자로 일렁이고 있었다.

 동생의 두 번째 받아쓰기가 있던 날 학교를 파한 진영이 책가방을 메고 깡충거리며 마당으로 들어왔다. 마루에 걸터앉아 받아쓰기 공책을 가방에서 꺼냈다. 받아쓰기 공책을 펴서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은영에게 내밀었다. 받아쓰기 공책에는 빨간 색연필로 '80'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은영을 바라보는 동생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은영이 받아쓰기 공책을 들고 엄마를 향해 고함을 지르면서 뛰어갔다.

 "엄마 80점! 받아쓰기 80점이라고. 엄마! 엄마!"

받아쓰기 80점을 받은 후로 동생은 나머지 공부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동생은 교실 칠판에 이름이 커다랗게 적히며 반장이 되었다. 글씨도 받아쓰기도 부끄럽지 않은 1학년이 되었다. 누나 은영의 봄이 동생의 80점 받아쓰기와 함께 아지랑이처럼 일렁대고 있었다.

 자기 이름도 못쓰던 동생의 글씨는 어른이 되어서도 단정하고 예쁘다. 그 글씨를 만든 건 8할이 은영이지만 동생은 다 잊은 것 같아 아쉽다. 달빛이 환한 밤이면 누나에게 머리를 쥐어박히며 자신의 이름을 그리며 밤새 받아쓰기 공부를 하던 까까머리 어린 동생과 받아쓰기 '80점'을 받아온 동생을 대견하게 바라보던 그때의 어린 은영이 생각난다. 이제 너의 이름은 잘 그리니? 받아쓰기는 잘하고? 늦은 밤 백열등 아래 받아쓰기를 하던 두 아이의 웃음소리가 달빛처럼 조용히 귓가에서 메아리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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