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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의손 May 19. 2024

첫 소풍

김밥 그리고 도시아이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첫 봄 소풍이 내일로 다가왔다. 은영은 저녁밥을 먹고 소풍날 입고갈 옷을 머리맡에 챙겨놓고 간식도 가방에서 몇 번이나 꺼냈다 넣기를 반복했다. 혹시 비라도 올까 봐 무릎 꿇고 기도까지 하고 나서야 겨우 잠자리에 들었다. 갓 입학해 키가 작아 항상 제일 앞자리를 도맡아 하고 키순으로 정해진 번호는 늘 1번이 당연했다. 소풍날도 다르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날은 키가 큰 아이들을 앞으로 세워 6학년을 선두로 출발했고 은영은 제일 뒤에서 자신만 한 가방을 메고 친구들과 수다를 떨며 열심히 걷고 있었다. 학교와 집을 벗어나 생소한 풍경을 보며 친구들과 가는 첫 소풍에 한껏 신이나 있었다.

 교문을 나와 먼지가 나는 흙길을 친구들과 걸으며 소풍의 설렘을 햇볕에 녹이고 있을 때 갑자기 교감 선생님께서 은영을 불러 새웠다.     

 “니 몇 학년이고?”

 “예? 1학년인데예”

 “니 괜찮나? 집이 어디고?”

 “예? 저기 OO리에 사는데예”

 “집에 약 있제? 집에 빨리 가봐라. 엄마 집에 계시나? 빨리 집에 가라”

갑작스러운 물음에 얼음이 되어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런 은영을 교감 선생님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잦은 병치레로 집에 약은 항상 있었다. 집에 가라는 말에 식구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닌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교감 선생님이 갑자기 집으로 가라고 하니 쭈뼛거리며 오던 길을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담임선생님도 아무 말 없이 집에 가라고만 하셨다. 낯가림과 수줍음이 많던 은영은 이유도 모른 채 집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흙길을 발로 차며 소풍을 가지 못한 분풀이를 하고 있었다. 날리는 흙먼지와 함께 느릿느릿 집으로 가고 있었다. 엄마는 김밥과 간식을 가지고 분명 소풍 장소에 온다고 약속을 했었다. 뒤를 돌아보니 반 친구들은 주위 풍경과 구별되지 않을 만큼 희미해져 있었다. 교감 선생님께 혼이 나더라도 고대하던 첫 소풍은 꼭 가고 싶었다. 양손으로 어깨에 멘 가방끈을 꼭 쥐고 친구들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가방에 든 물건들이 흔들리며 부딪혀 요란스럽게 소리가 났다. 어깨에 멘 가방이 털썩거리며 등과 엉덩이를 때렸다. 첫 소풍을 망쳐버릴 수 없다는 마음에 한참을 뛰고 나서야 친구들을 따라잡았다. 온몸이 땀 범벅이 되고 숨이 턱까지 찾지만 힘들지 않았다. 소풍 장소에 도착해 인원 점검을 마치고 나무 그늘에 자리를 잡고 고대하던 점심시간이 되었다. 동네 사람들과 함께 도착한 엄마 손에는 새벽에 같이 준비한 음식들이 들려져 있었다. 요술공주 밍키가 그려져 있는 양은 도시락에 곱게 담긴 엄마의 김밥이 들어 있었다. 김밥을 입에 넣으며 아침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쉬지도 않고 조잘대는 나를 보며 엄마는 잘했다고 칭찬을 했다. 봄 소풍이 끝나고 늦은 오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엄마는 손을 잡아끌며 발걸음을 재촉했지만, 봄바람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은영은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집으로 돌아온 은영은 행복한 기억을 안고 코를 골며 곯아떨어졌다.

 교감 선생님은 키만 한 가방을 메고 소풍 가는 꼬마 아이가 대견해 무심코 쳐다봤는데 시골아이 같지 않게 희고 뽀얀 얼굴에 놀라 아프다고 생각해 걱정스러운 마음에 은영을 집으로 돌려보낸 것이었다. 그 뒤로 소풍 가는 날이면 엄마는 김밥을 마는 것을 지켜보는 은영에게 얼굴이 너무 하얘서 아픈 것 아니냐고 물으며 아픈 사람이 김밥을 먹으면 안 된다고 놀렸다. 그러면 은영은 재빠른 손으로 김밥 꽁다리를 입에 넣고 씹으며 말없이 김밥에 화풀이를 했다.     


 어린 시절 시골스럽지 않게 희고 뽀얗던 내 얼굴은 세상에 치여 차고 넘치게 시골스러워졌다. 언제부터인가 일주일에 몇 번씩 김밥을 무의식적으로 싸기 시작했다. 김밥을 만드는 시간이 마치 소풍 전날의 설레는 마음 같아 행복하다. 김밥 하나에 이렇게 입꼬리가 올라가고 흥이 차오르니 일주일에도 몇 번씩 김밥을 만드는지도 모른다. 오늘도 아쉬운 주말을 보내며 김밥을 만든다. 출근은 소풍이 아니니 많이 먹고 먹은 만큼 두껍고 질기게 현실의 방호복을 만들어 본다. 현실이 나를 채 썰어 지지고 볶아 소금을 쳐 둘둘 말아도 아프다 비명 지르지 않고 견딜 수 있게. 수없이 마음이 잘려 나가더라도 김밥처럼 쉽게 잘리지 않게. 어쩔 수 없이 세상이라는 칼로 난도질당하더라도 김밥처럼 예쁘고 곱게 잘려 흉하지 않도록 어린 시절 추억과 행복감을 양껏 끌어와 현실을 살아내는 방호복의 단추를 하나하나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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