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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틴K Jan 17. 2024

나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세 번째 이야기

작년 겨울 어느 날. 오랜만에 술을 많이 마셨다. 그냥 목구멍에 닥치는 대로 술을 들이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몇 년 만에 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나 기분이 좋아진 탓도 있겠지만, 그날따라 새직장에 적응하랴, 아빠를 돌보랴 여러모로 긴장되었던 마음을 푹 내려놓고 싶었다. 술을 못 먹는 편은 아니지만, 술을 딱히 좋아하지도, 술에 취해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기도, 다음날 아침 숙취로 가득한 몸뚱이를 일으키기도 싫어하기 때문에 술을 멀리하는 편인데, 그날은 물 한 모금 없이 그렇게 흠뻑 술로 갈증을 풀었다.


"괜찮나?"


두 친구가 담배를 피우러 나가고, 우리 집 사정을 알고 있는 친구가 나에게 물었다. 괜찮지 않다고 대답했다. 나는 괜찮지 않았다. 하루하루의 병간호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느 정도 아빠에게 잘 맞춰줄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면서도, 이 정도면 나의 지금의 삶에 만족해야지 생각하면서도, 평소에는 주변에 있는 줄도 몰랐던 작은 바늘이 내 마음을 폭 찔러버리면, 바람 빠진 풍선처럼 한 순간에 마음이 무너지곤 한다. 이런 나의 모습이 다른 사람에게는 어떻게 비치어질까 걱정이 되기도 하고, 이러한 짐을 지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할까 고민이 되기도 한다. 나는 알게 모르게 무력해지고 늘 긴장하게 된다.


"나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물론 본인도 내 상황이 되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친구인 입장에서 나를 보면, 그냥 내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착한 놈이다. 사실 나는 친구 놈의 이 말에 무너져서 술을 부었다. 그전까지는 아들이 어디에 갔는지 100번을 말해도 또 잊어버리며 걱정하는 아버지를 위해, 그 곁에서 힘들어하는 엄마를 위해 얼른 집에 들어가야지 되뇌었지만, 이성은 무자비하게 들어오는 알코올에 녹아내렸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서야 술자리를 떠나 터덜터덜 집에 돌아왔다.


지난주에는 전 직장을 찾아가 오랜만에 옛 동료들을 보았다. 가장 바쁜 시기에 녹록지 않은 각종 행사를 뒤로하고 새로운 직장으로 떠난 나에게도 전 직장 동료들은 언제나처럼 따뜻한 품을 내어주었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난 후, 로비로 내려와 나와 함께 퇴사를 고민하던 동료 직원과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모든 사람의 인생이 그렇겠지만, 그의 인생도 쉽지가 않았다. 결혼과 이직, 그리고 이민이라는 인생에 있어서의 굵직굵직한 선택의 갈림길 속에서 그는 여전히 고민의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단호히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사실 어떠한 결정을 하더라도 잘 해낼 동생이었기에 나는 내 의견을 말하기보다는 그의 상황을 들어주며 고민거리를 조금은 털어주려는 대화를 이어나갔다. 대화가 어느 정도 무르익고 그는 나의 근황을 물어봤다. 나는 최대한 담담하고 솔직하게 그에게 나의 하루하루를 전했고 그는 나의 한 단어 한 단어를 귀 기울여 들어주었다.


"저도 OO 선생님의 상황을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말씀드리기 조심스러운데요. 저도 그 상황이 되면 똑같이 할 것 같긴 해요. 그래도 저는 OO 선생님이 좀 더 행복해졌으면 좋겠어요."


그 순간에 그의 입을 통해 전해진 말은 나의 마음에 크게 와닿았다. 왜 그랬을까. 직전에 그도 그의 삶의 무게를 공유해 주어서일까. 아니면 그날따라 나의 마음 상태가 말캉말캉 여리고 여린 상태였기 때문일까. 아니면 전 직장의 미화된 추억에 빠져버려서일까. 정확한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그 말속에는 그 친구가 최선을 다해 전하려 한 따뜻한 진심이 어려 있었다는 것이다.


사실 간병인의 삶은 고독한 삶에 더 가깝다. 주변에 아무리 따뜻한 사람들이 있더라도 나의 마음을 온전히 그들에게 기대기엔 나의 삶이 너무 지난하고, 그 지난한 삶을 오롯이 전달할 수 있는 능력도 나에게는 없다. 그리고 팍팍한 모래알 같은 삶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서 그 자리의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도 않다. 그러다 보니 주변에 사람들을 만나는 것에 대해서 알게 모르게 부담감을 느끼게 되고, 주변 사람들이 섭섭해야 할 상황도 많이 생기게 된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만날 수 있는 절대적인 시간도 부족하다.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 속에서 나는 더더욱 홀로 메말라가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 나에게 친구와 직장 동료가 톡 던진 말 한마디는 잔잔한 물결이 되어서 내 마음에 퍼진다. 그리고 그 물결 덕분에 저 깊은 곳에서 꼭 뭉쳐져 있던 나의 검붉은 응어리도 풀어져서 마음 전체를 따뜻한 분홍빛으로 물들인다.


얼마 전 티브이에서 신년음악회를 본 적이 있다. 어떤 합창단에 나와서 변진섭의 '우리의 사랑이 필요한 거죠'라는 노래를 불러주었다. 아빠의 손을 잡고 그 노래를 듣는데, '길을 걷다 멈춰진 그 길가에서 마냥 울고 싶어 질 때'라는 노래 가사처럼 문득 마음이 뻐근해졌다. 유독 인생의 무게로 넘어질 것 같은 순간이 많은 요즘. 주변에서 사랑의 온기를 나누어주는 소중한 사람들이 있어서 또 하루를 살아갈 용기와 힘을 얻는다.


그리고 나의 존재도 그들의 인생의 무게를 덜어줄 수 있는 작은 힘이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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