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저녁에는 아빠의 손을 2시간쯤 꼭 붙잡고 있었다. 화장실에 가려고 손을 풀었을 때 손목이 뻐근할 만큼, 손등에는 논바닥 갈라진 듯 주름이 자글거리지만 손바닥은 아직 말랑하고 두툼한 아빠의 손을 오랜만에 긴 시간 잡고 있었다. 이 말은 아빠가 2시간 동안 망상이나 우울감에 빠지지 않고 안정적으로 지냈다는 말과 같다. 아빠가 요새 좀 괜찮다는 말을 엄마와 나누기 무섭게 돌변하는 아빠의 상태를 수차례 경험하며 일희일비하지 말자고 다짐하고, 마음을 다잡지만 지난 저녁처럼 아빠의 온기가 오롯이 내 손을 타고 전해지는 날이면 무엇인가 무겁게 짓누르는 것 같았던 내 마음도 한결 가벼워진다.
'일희는 하더라도 일비는 하지 말자.'
아빠의 널뛰는 감정상태에 휩쓸려 나의 마음도 정처 없이 떠돌면 안 되겠지만, 어젯밤처럼 따뜻했던 날에는 그 감정에 폭 빠져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일희일비 하지 말자는 마음은 아빠의 일시적으로 호전된 상태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고 기대감을 갖게 되어, 더 큰 낙폭으로 실망과 좌절을 경험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감정을 다잡는 일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이겠는가. 다치기 싫어서 아무리 이성적으로 따져가며 세상을 바라보려 해도, 결국 찰랑거리는 감정의 샘은 생각지 못한 곳에서 생각지 못한 방식으로 툭 터져 넘쳐버리곤 한다. 문득, 그냥 좀 바짝 조였던 마음의 끈을 조금은 느슨하게 풀어도 괜찮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감정의 샘이 어디로 흘러가지 못하고 쌓이고 쌓여 찰랑거리기 전에, 조금씩 나의 감정을 흘려보내는 것도 중요하다는 생각. 그것이 부정적인 감정일 수도 있고 긍정적인 감정일 수 있겠지만, 긍정적인 감정이라면 더더욱 애써 숨기지 말고 드러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이런 생각이 든 것은 무엇보다 엄마의 마음을 다독이기 위함도 있다. 엄마는 나보다도 더욱 아빠를 포기하지 못했다. 바람 한줄기에 공기 중으로 푹 흩어져버려 어디로 가버렸는지 알 수가 없는 민들레 씨앗처럼 1분도 지나지 않아 휘발될 기억이라는 걸 알면서도, 엄마는 아빠에게 셈을 가르치고, 시계 보는 법을 알려주고, 성당에서 미사에 어떻게 참여하면 되는지를 반복해서 알려준다. 어떤 날은 아빠가 기쁜 마음으로 하나씩 알아가지만, 대부분은 답답한 마음을 토로하며 짜증을 내곤 한다. 아빠의 기분과 상관없이 엄마가 목이 터져라 알려준 지식들은 봄날의 새벽 서리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런데 어쩌다 아빠가 엄마가 알려준 것을 기억해 낸 날이면 엄마는 뛸 듯이 기뻐하며 흥분감을 감추지 못한 채, 퇴근한 나에게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준다. 나는 엄마가 또 실망할 것을 알기에(혹은 내가 또 실망할 것을 알기에), 우연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말하며 헛된 기대를 품지 말자고 이야기한다. 소녀 같은 우리 엄마는 나의 살얼음 낀 말에 상처받았을 것이다. 아들은 그렇게 엄마의 따뜻한 성냥불 하나에, 성냥불을 하나 더하는 대신 차가운 얼음물을 부어버렸다.
간병인에게 있어 지나친 희망은 금물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특히 치료약이나 치료 방법조차 없어 하루하루 조금 더 느리게 나빠지기를 기도해야 하는 치매와 같은 병의 경우 더더욱이나 그렇다. 지속되는 지나친 희망과 그에 따른 좌절의 반복은 간병인의 삶을 더욱 불안정하게 만든다. 요동치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간병인의 정신은 더 피폐해지고 이것이 환자에게까지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 겪어온, 그리고 앞으로 헤쳐나가야 할 간병의 고된 길을 생각해 보면, 조금은 느슨해져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느슨해져야 살아남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로는 헛된 희망이 절망의 부메랑이 되어 날아와도, 적당히 희망을 붙들어야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조그마한 초콜릿 조각 하나가 직장에서 오후를 버틸 수 있는 묘약이 되는 것처럼, 희망의 끈에 매달리진 않더라도 톡톡 당겨보며 미약하게나마 희망이 곁에 존재함에 위로를 받으며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 겪어온, 그리고 앞으로 헤쳐나가야 할 간병의 고된 길을 생각해 보면, 조금은 느슨해져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느슨해져야 살아남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로는 헛된 희망이 절망의 부메랑이 되어 날아와도, 적당히 희망을 붙들어야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조그마한 초콜릿 조각 하나가 직장에서 오후를 버틸 수 있는 묘약이 되는 것처럼, 희망의 끈에 매달리진 않더라도 톡톡 당겨보며 미약하게나마 희망이 곁에 존재함에 위로를 받으며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폭설로 예보되었던 눈이 무참히 쏟아지기보다는 바람에 실려 소복이 내려오고 있다. 폭발해 버릴까 두려운 나의 감정 상태도 막상 열어보면 잔잔한 가을바람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렇게 마음의 통로를 열어 두어야 나도 숨을 내어 쉬고 신선한 공기를 마실 여유가 생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