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마주하기
아빠를 미워하지 않게 해 주세요.
매주 주말에 성당에서 조용히 드리는 기도가 있다. 이번 주도 힘을 내서 현실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달라는 기도와 함께, 아빠를 미워하지 않도록 해 달라고. 그리고 그 기도를 하는 동안 내 손은 거친 세월의 풍파가 발톱을 잔뜩 세워 휘갈기고 지나간 듯, 주름이 자글거리는 아빠의 손을 어루만지고 있다. 아빠는 어떤 날은 내 손을 같이 꼭 잡아주기도 하고, 어떤 날은 빙그레 웃기도 하고, 어떤 날은 아빠도 나를 따라 엄마의 손을 잡기도 하지만, 어떤 날은 혼이 나간 듯 눈을 깜빡이며 혼란스러워하고, 어떤 날은 눈을 질끈 감고 내 손을 뿌리치고, 어떤 날은 깊은 한숨만 푹푹 내쉬며 자기만의 고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 아직 아빠를 포기하지 못한 나의 감정은 아빠의 반응에 따라 함께 요동친다.
그렇다. 나는 아빠를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아빠는 치매이다. 병의 진행을 늦추고 증상을 경감시키는 것이 최선일뿐, 아직 치료 방법조차 없는 알츠하이머. 어느덧 병 진단을 받은 지도 어느덧 5년이 다 되어간다. 아빠의 증상도, 병의 진행 속도도, 감정 변화의 폭도 많이 변했지만, 나와 우리 가족의 삶도 많이 변했다. 대학 진학을 위해 상경하며 시작했던 오랜 자취 생활을 청산하고 나는 부모님과 같이 살게 되었고, 두 번의 이직, 유학 포기 후 귀국 등의 소용돌이 속에서 최근 몇 년을 버텼으며, 대부분의 여가 시간은 아버지와 함께 보내고 있다. 마치 예기치 못한 폭우에 모든 것이 쓸려가듯 6년 전에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일들이 휘몰아쳐 정신 차리기 조차 힘든 하루하루를 보냈다. 요새는 혼돈이 일상이 되어 어느 정도 안정감을 되찾았지만, 아직도 꽤나 자주 몇 가지의 상황으로 촉발되어 목구멍 끝으로 토하듯 올라오는 감정의 폭발을 꾹꾹 되삼 켜 눌러 담느라 끙끙거리곤 한다.
사실 아빠의 이야기를 적기로 결심하기까지 많은 고민이 있었다. 기쁠 때 보단 힘들 때 글을 쓰게 되는 나의 특성상 글이 순간적으로 폭발한 감정의 쓰레기통이 되지 않을까 걱정했고, 아빠의 실질적인 동의도 없이 아빠의 삶이 (몇 안되긴 하지만) 나의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께 노출되는 것이 죄송스럽기도 했다. 사실 그 무엇보다도 글을 통해서 나 자신이 얼마나 솔직하게 나의 경험과 감정, 생각을 써 내려갈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과 우려가 가장 컸다. 주변 사람에게도 나는 먼저 연락하거나 나의 이야기를 잘하지 않는 사람이고, 더군다나 나의 힘든 이야기는 잘 털어놓지 않는 편이다. 남들에게 완벽하고 강하게 보이고 싶은 마음도 있겠지만, 이 모든 털어놓음의 과정 그 자체가 나에겐 너무 어색하고 어려운 과정이다. 세상에는 나보다 힘들고 어려운 사람이 많은데 이 정도로 징징거리는 것이 꼴불견은 아닐까 싶은 마음도 있었다. 이런저런 생각 끝에 매번 마음속으로만 생각하다가 다른 이야기만 적어 내려가기 일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연재를 통해 아빠와 함께하는 삶을 기록하기로 결정한 것은 나를 위함이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이 어떤 이야기를 기대하실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아빠의 이야기 그 자체보다는 아빠, 그리고 엄마 곁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나의 이야기'를 담고자 한다. 나의 감정을 억누르며 부모님의 감정에 더욱 예민하게 반응하다 보니, 정작 나를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을 갖는 것이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다. 이미 피곤한 정신상태를 가지고 침대에 누우면, 그러한 시간을 갖는 것 자체가 피곤한 일이 되어버려 넷플릭스나 유튜브 영상만 보다가 잠이 들곤 했다. 이렇게 살아가다 보니 점차 속 깊은 곳에서는 곪아가기 시작했고, 문득 누군가가, 혹은 어떠한 외부의 자극이 그곳을 톡 건드리기만 해도 상처가 터져 진물이 쏟아져 내릴 것 같은 상태가 될까 두려워졌다. 그래서 이번 연재를 통해 나는 가족과의 유대 관계 속에서 부모님을 돌보는 동시에 나를 어루만지는 시간을 가지려고 한다. 이곳에 쓰이는 글들은 그러한 마주함의 기록이 될 것이다.
장황하게 연재를 시작하는 마음을 써 보았지만, 이 연재를 얼마나 이끌어갈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아버지의 급변하는 상태도 변수가 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나의 요동치는 마음과 빡빡한 스케줄도 걱정이 되긴 한다. 그래도 한 번 마음먹었으니 할 때까지는 해봐야지 싶다. 1주일에 한 번이 무리라면 적어도 2주에 한 번이라도 해보자. 내 마음이 건강해야 또 부모님과 함께 따뜻한 하루하루를 꾸려갈 수 있을 테니.
그리고 언젠가 부모님이 모두 곁을 떠나신 다음의 삶도 살아갈 수 있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