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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틴K Mar 13. 2024

포기하는 중입니다

열 번째 이야기

오랜만에 퇴근 후 저녁에 친구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7시쯤 만나서 밥을 먹으며 한창 이야기를 하고, 주차비를 아끼기 위해 차를 세운 마트에 가서 간단하게 친구와 함께 장을 보았다. 장을 보고 나니 8시 반. 커피라도 한잔 더 마시고 헤어지고 싶었지만, 우리 집 사정을 아는 착한 친구는 들어가 봐야 하지 않냐고 먼저 물어봐 주었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음이 울리고 자동차 스피커를 통해 전해지는 엄마의 목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힘이 들어 보였지만, 언제 오냐고 물어보는 아빠의 밝은 목소리에 마음을 쓸어내리며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부모님은 책을 펴놓고 두뇌 활성화를 돕는 간단한 퀴즈를 풀고 있었다. 나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한껏 톤을 높여 아빠와 엄마에게 인사를 건네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냉랭한 반응뿐이었다. 아빠는 가쁜 숨을 내쉬며 문제를 풀고 있었고, 엄마는 아빠의 앞에서 힌트를 던져주고 있었다. 공부에 집중하고 있어서 그랬겠거니 하고 옷을 갈아입고 나온 순간 아빠가 큰 소리로 엄마에게 화를 내었다. 본인이 바보 멍청이라는 자조 섞인 한탄과 함께 본인에게 소리 지르고 업신여기면 안 된다는 분노 어린 훈계가 쏟아졌다. 아빠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렸고 호흡도 불안정했다.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려 자리를 잠시 피한 엄마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자, 오늘 하루종일 아빠의 정신 상태가 불안정했고, 망상과 오르내리는 감정에 힘들었다고 하셨다. 나의 전화를 끊고 나서 다시 그런 조짐이 보이자, 엄마는 아빠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책을 펼쳤고, 아빠가 유독 어려워하는 파트의 문제를 풀다가 설명하는 중에 엄마의 언성이 조금 높아졌던 것 같다. 가뜩이나 불안정한 감정 상태에서 들려온 높은 톤의 엄마 목소리는 위태위태하던 감정의 둑을 순식간에 무너뜨려 버렸을 것이다. 엄마가 짜증은 조금 냈을지 몰라도, 실제로 아빠를 나무라기 위해 큰 소리를 지르진 않았을 것이다. 고음성 난청을 가지고 있는 아빠의 귀는 엄마의 목소리 크기와 톤을 몇 배로 증폭시켜서 인식하기 때문에 아빠는 엄마의 말을 더욱 예민하게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가부장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는 아빠는 엄마와 아들이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착각이나 망상에 대해서 특히나 예민하게 반응한다. 이런 모든 원인들이 결합되어 아빠는 분에 못 이겨 부들부들 떨면서 감정의 소용돌이 속으로 자신을 밀어 넣고 있었다. 나중에는 본인이 무엇 때문에 화가 났는지를 잊어버리고 분노와 정신적인 혼란만 남아 끊임없이 이야기를 이어간다.


이 모든 상황을 곁에서 감당하며, 어떻게든 진정시키려 노력하는 것은 곁에 있는 가족의 몫이다. 그런데 그러한 상황에 빠져있는 엄마와 나도 감정의 동물이기 때문에, 널뛰는 감정의 폭풍우 속에서, 비와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침착함을 유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아빠의 상태가 심각한 날이면, 혹은 나의 감정 상태가 불안정한 날이거나 몸 컨디션이 좋지 못한 날이면 더욱 맥락 없이 쏟아져내리는 망상을 논리적으로 조목조목 반박하며 말도 안 되는 아빠의 말을 끊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불쑥불쑥 올라온다. 그렇게 하면 아빠의 감정이 더욱 상해서 더욱 깊은 분노로 치닫게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어제도 시간이 지나도 쉽게 진정되지 않는 아빠를 보면서 나의 감정 상태를 걱정한 엄마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아빠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사실 엄마는 미안할 게 없다. 엄마에게 소리 질렀다고 뭐라고 하는 아빠야말로 1시간이 다되도록 성질을 부리며 소리를 지르고 있다. 하지만 사실관계는 중요하지 않다. 아빠를 위해. 그리고 곁에 있는 우리를 위해 아빠의 감정을 다독이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그렇게 한동안  엄마가 아빠의 감정을 어루만진 후, 내가 바통을 이어받아 아빠의 얼굴에 미소를 되찾았다. 그리고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 잠깐 자리를 비운 엄마가 얼마나 아빠를 생각하고 마음을 다하는지에 대해 아빠에게 넌지시 말했다. 감정이 회복되어 분노했던 것조차 잊은 아빠는 금세 본인의 마누라가 최고라고 웃으며 엄마에게 가서 축 처져있는 엄마의 어깨를 주물렀다. 정말 환장할 노릇이다.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추스르고 확인할 새도 없이, 아빠의 감정에 반응하며 덩달아 미소 지어야 한다. 나의 감정과 자존심을 앞세워서 남는 건 유감스럽게도 상황의 악화뿐이다. 우리는 그렇게 치매라는 병마에 조금씩 적응해 왔다.


'포기하자.'


하루하루 치매와 동거하며 엄마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되뇌는 말이다. 치매란 병은 희망이 없다. 예방법도, 치료법도 없다. 그저 증상을 완화시키고, 악화 속도를 지연시키는 것뿐이다. 약 개발 소식이 들려오지만 아직 상용화는 요원하다. 아빠의 상태가 좋아질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없다. 우리의 노력에 따라서 치매란 병이 호전될 수 있다는 희망은 그야말로 희망 고문일 뿐이다. 하지만 사랑하는 아빠이기에 이 사실을 직시하고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다. 사실 아직 100% 받아들였다고 하는 것은 무리이다. 하지만 이제 이것을 사실로서 받아들이려고 수시로 노력하고 있다. 그래야만 내가 아빠에게 너그러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가끔씩 터져 나오는 아빠의 짜증과 갑작스러운 나무람이 치매로 인한 어쩔 수 없는 증상의 일부임을 받아들일 여유가 생기게 되고, 갈수록 잦아지는 망상과 혼돈의 빈도와 깊이에 대해 의문이나 답답함을 가지기보다는 자연스러운 치매의 진행 과정임을 인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아빠를 위해서, 그리고 엄마와 나 자신을 위해서 아빠를 포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글을 쓰다 보니 포기의 다른 말은 있는 그대로 품어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원하는, 혹은 내가 생각하는 아빠의 모습이 아닌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해버린 아빠의 현재 상태를 포기하는 것은, 다시는 과거의 달콤한 나날들로 돌아갈 수 없는 가련한 아빠를 오롯이 품어주는 것과 같다.


런 의미에서 나는 아빠를 포기하는 중이고, 동시에 아빠의 모든 것을 더욱 끌어안으려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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