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치매 판정을 듣고 가장 힘든 점은 희망이 없다는 점이다. 이전 글에서도 여러 번 언급했지만, 치매라는 병은 아직 치료법도, 예방법도 없어서 아빠는 점점 생명의 빛을 잃어가고 있다.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아빠의 병세의 진행 속도는 예상했던 것보다는 천천히 진행되고 있다. 아빠의 기억은 서서히 좀먹어가고 있고, 새로운 종류의 망상에 당황할 때도 많지만, 이 정도면 아직 최악은 아니다 싶은 정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년의 아빠의 상태와 비교해 보면 증세는 많이 악화되었다. 과거의 기억은 미화되기 마련이고, 과거와 단순 비교하기에는 증세의 양상이 다른 부분도 분명히 존재하지만, 기억력도 망상에서 힘겨워하는 주기도 더 악화된 것은 확실하다.
친구들은 나에게 말한다. 사실 어떤 상황인지, 얼마만큼 힘든지 잘 상상이 안된다고. 나였어도 아마 그랬을 것이다. 드라마, 영화, 다큐멘터리를 통해서 접하는 치매는 사실 치매의 일부분만을 전달할 뿐이다. 예를 들어서 집을 나가서 헤맨다든지, 폭력성을 드러낸다든지, 가족들을 전혀 알아보지 못한다든지. 극적인 전개를 위해서 가장 직접적으로 가슴을 찌르고, 감정의 파도를 휘저어 놓으며, 가족의 아픔을 가장 잘 드러내는 장면들. 그러한 장면들도 어느새 나의 일상이 되어가고 있지만, 사실 몇 년 간 아빠를 지켜보며 가장 힘든 것은 그러한 극적인 상황보다는 하루하루의 일상이다. 계속되는 같은 질문, 좀처럼 빠져나오지 못하는 우울감, 그 뒤에 이어지는 종잡을 수 없는 감정기복, 이성적인 사고가 불가능한 데서 오는 끝없는 감정 소모. 아빠의 머릿속은 또렷한 실체 없이 그저 무중력 상태에서 자기 멋대로 유영하는 죄다 자기 멋대로 찢겨버린 신문지 조각들로 가득 차 있는 것 같다. 그런 지난한 순간순간들을 일상으로 받아들이고 마주해야 하는 매 순간순간들이 가족들에게는 가장 지쳐버리는 순간들이다. 사실 이런 순간들은 직접 겪어보지 못하면 그 아픔을 잘 알 수가 없다.
치매의 증상의 종류와 정도도 환자에 따라서 많이 달라서, 사실 치매에 관련된 자료나 영상을 일부러 찾아보지는 않는 편이다. 그러한 다양한 환자의 케이스를 보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아빠의 현재 상태와 상대적 우위나 열위를 매기게 되고,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감정적인 소모가 일어나는 경우가 많아서 어느 순간부터 그러한 자료는 잘 찾아보지 않고 있다. 예를 들어서 본인의 병을 인지하고, 조금이나마 병세를 늦추고 기분을 좋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환자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왜 우리 아빠는 저러지 않을까를 생각하게 되고, 폭력적인 증상이 나타나는 케이스를 보면서는 아빠가 저러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앞으로 저렇게 되면 어떻게 하지라는 걱정이 밀려온다. 그러한 콘텐츠로부터 얻는 지혜와 지식도 분명 중요할 수 있겠지만, 쉽게 감정적으로 변해버리는 나의 위태위태한 마음에는 그렇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그러던 중 어떤 책을 읽게 되었다. 그 책에서는 부모님 곁을 떠나 도시에서 일을 해 나가다가 어머니가 치매에 걸려 모든 커리어를 정리하고 어머니 곁으로 돌아온 딸의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일부러 무미건조한 눈으로 거리감을 유지하며 책을 읽어 내려가는데, 힘들지 않냐는 질문에 대한 그녀의 대답이 마음을 쿵 울렸다. 어머니를 돌보면서 힘든 순간도 분명 존재하지만, 행복한 순간도 많다는 것이다. 힘든 순간만 보는 것이 아니라, 행복한 순간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하는 순간이 정말 소중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순간 치매라는 병에 대해서 너무 내리막길로만 생각한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하였다. 물론 치매라는 병은 길게 보면 내리막길임이 분명하다. 아빠도 언젠가는 우리들 모두를 기억하지 못하게 될 것이고, 언어 능력을 잃어가게 될 것이고, 대소변도 가리지 못하는 상황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다가 아빠는 우리의 곁을 떠나게 될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죽음에 이르는 그 길고 긴 길을 유턴해서 돌아 나올 희망은 없다. 하지만 하루하루를 떼어내어 생각해 보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다. 분명 1년 전의 아빠보다는 나빠졌지만, 어제의 아빠와는 다른 모습일 수 있다. 영상통화를 하다가 내 모습이 반가워 화면 가득 터질 듯 채워지는 아빠의 따뜻한 미소가 퍼지는 어느 날. 흥겨운 음악에 맞추어 손만 까닥이다가 갑자기 일어나 엉덩이를 씰룩이는 어느 날. 곁에 있어주어 고맙다며 꼭 안아주는 어느 날. 또 어떤 것을 잃어버리고 헤매고 있나 하고 아빠를 찾아보니 화장실에서 깨끗하게 손을 씻으며 활짝 웃어 보이는 아빠를 발견한 어느 날. 상쾌하게 아빠의 머리를 감겨주는 어느 날. 사실 치매 덕분에(?) 행복감을 느끼는 소소한 순간도 함께 많아진 것도 사실이다.
아빠가 나에게 자주 해주시던 말이 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치매를 마주한 나는 그동안 피할 수 없으니 어떻게 이 아픔을 감당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 왔던 것 같다. 물론 치매 간병이라는 하루하루를 즐기기는 어려울 것 같다. 하지만 갓 자른 레몬에서 터져 나오는 상쾌하고도 새콤한 향기처럼 순간순간 예상하지 못하게 터져 나오는 아빠와의 즐거운 찰나들의 소중함을 만끽하는 것은 나에게도, 아빠에게도 너무나 소중한 일임을 깨닫는다.
어쩌면 얼마 남지 않았을 아빠와의, 그리고 그 곁을 함께 지키고 있는 엄마와의 이른 봄의 따뜻한 햇살 같은 추억들을 더욱 소중히 만끽하고 가슴에 품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