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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마뱀마법사 Aug 04. 2023

두려움 그 허상에 대하여

“쓰리, 투, 원, 점프!”

“잠깐 잠깐 잠깐만요…”

“자, 준비 되셨나요?”

“네!”

“쓰리, 투, 원, 점프!”

“잠깐 잠깐 잠깐…”

번지 점프대에 올라선 발이 내 마음과는 다르게 도통 떨어지질 않는다. 안전장치는 이미 나와 안전 요원이 모두 확인했고, 내 옆의 안전 요원이 괜찮다 말해주고, 발 아래 안전요원도 혹시나 있을 사고에 대비해 나를 기다리고 있음에도 점프대에서 쪼꼬미들이 가득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자니 두려움이 자꾸 차 오른다. 여기서 뛰면 정말로 모든 게 끝날 것 같다. 그렇게 잠깐만 마음을 가다듬겠다며 외친 ‘잠깐만’이 벌써 몇 번 째인지 모르겠다. 지금껏, 뭐 그리 오래 살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했던 건 온통 나의 허세였던가. 나는 비싼 돈을 내고 지금 느끼는 이 두려움을 산 것인가.

“쓰리, 투, 원, 점프!”

“잠ㄲ…”

잠깐이라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하늘을 날고 있다. 말 그대로 하늘을 날고 있었다. 무려 14,000ft(약 4,270미터) 상공의 경 비행기에서 떨어지는 스카이 다이빙. 그렇기 때문에 자격증이 없는 스카이 다이빙 체험자는 혼자 뛸 수 없다. 가이드와 함께 뛰게 되는데, 나처럼 ‘잠깐’이라고 외치는 체험자를 수도 없이 만났을 나의 인스트럭터는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를 비행기 밖으로 밀어낸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하늘을 난다.

여행을 다니며 다양한 액티비티들을 경험했지만, 그 중에 딱 하나만을 꼽아서 다시 하라고 한다면 나는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스카이다이빙’을 꼽을 것이다. 비행기 따위에 의존하지 않고, 내 몸으로 하늘을 나는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스카이다이빙과 번지점프 뿐이라고 생각한다. 직접 해보지 못한 사람들은 떨어질 때 엄청난 중력을 느낄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는 그 속도감이나 떨어지는 느낌을 거의 받지 못한다. 아마도 주변의 광활함 때문이리라. 우리가 속도감을 느끼는 것은 직접 체감하는 것 보다 시각으로 보여지는 것으로 인해서일 때가 더 많다. 실제로 자동차를 타고 달릴 때, 그 보다는 훨씬 빠른 기차를 타고 달릴 때 보다 더한 속도감을 느끼지 않던가. 차를 타고 달릴 때는 창을 통해 가까운 곳을 보게 되니, 내 눈에 보이는 풍경은 더 빠르게 움직이기 때문에 체감하는 속도도 빠르다. 반면 번지점프나 스카이다이빙을 할 때는 넓은 벌판, 바다, 하늘을 보면서 떨어지기 때문에 나를 둘러싼 풍경은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 그래서 떨어지는 그 순간만 버텨내면 하늘에 내 스스로 떠 있는 듯한, 말로 표현이 불가능한 평화로운 느낌을 경험하게 된다. 물론 내 느낌과는 달리 실제로는 엄청난 속도로 떨어지는 중이니, 너무 좋더라도 입을 벌릴 때는 조심하는 것이 좋다. 떨어질 때 느껴지는 공기압으로 인해 예능에서 흔히 보던 벌칙인 공기총을 쏜 것처럼 못생겨짐은 물론이거니와, 입에서 침이 흘러나오는 경험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특별하고도 황홀한 감정을 느끼기 위해서는 떨어지는 순간의 두려움을 이겨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고소 공포증 따위를 논하지 않더라도, 올라선 곳에서 아득한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자면, 내 몸을 감싸고 있는 안전장치 따위는 그저 몸에 걸쳐져 있는 것일 뿐,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바닥을 향해 무거운 내 몸을 던져야 한다는 사실만이 머리에 맴돌 뿐. 내가 했던 번지점프는 약 123미터 정도에서 떨어지는 것이었고, 스카이다이빙은 4,270미터 위를 날고 있는 비행기에서 떨어져야 하는 것이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자면 고작 123미터에서 뛰는 번지점프보다 그보다 훨씬 더 높을 뿐 아니라, 착륙장이 잘 보이지도 않는 비행기 안에서 뛰어내려야 하는 스카이다이빙이 몇 배는 더 무서워야 하겠지만, 그 공포는 번지점프가 훨씬 더 크다. 그 이유는 ‘내 스스로’ 떨어지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함께 점프하는 인스트럭터가 비행기 밖으로 밀어주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하늘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두려움의 순간은 짧고, 환희의 순간은 ‘나도 모르게’ 찾아와 있다. 반면 번지점프는 ‘내 스스로’ 떨어져야 한다. 내 스스로가 끝일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이겨내고 움직이지 않는 발을 떨어뜨려 허공을 향해 ‘점프’ 해야만 환희의 순간으로 들어갈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가 느끼는 두려움은 전혀 이성적이지 않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 좋게 포장해 아이러니, 솔직하게 말해 멍청한 - 일인가. 우리가 두려움을 느낄 때 그 원인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그것을 안다고 해도 실체적인 진실보다는 느낌적인 느낌에 의존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리고 많은 경우 실체적인 진실은 느낌적인 느낌보다 훨씬 사소하다. 때문에 무언가를 두려워하기에 앞서 내가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두려운 것은 맞는지, 혹은 존재하기는 하는 것인지 한 번쯤, 찬찬히 생각해보자.

우리는 마음 속에는 두 마리 늑대가 사는 데, 하나는 늘 긍정적인 마음을 가진 선한 늑대, 하나는 늘 부정적인 마음을 가진 악한 늑대라고 한다. 이 둘 중에 이기는 늑대는 누구일까? 인디언 속담에서 말하길, 이 두 마리 중 이기는 쪽은 우리가 먹이를 주는 늑대라고 한다. 혹시 우리는 내가 가진 두려움에 나도 모르게 먹이를 주며 그것이 자라날 수 있도록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안된다고, 두렵다고 말하기 전에, 내가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바로 보자. 그것이 혹시 내가 키운 것이라면 뛰어넘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뛰어 넘을 때, 내 두려움을 스스로 뛰어넘은 사람만이 맛볼 수 있는 환희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쓰리, 투, 원 점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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