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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바람이 인다

폴 발레리 시 <해변의 묘지>

by 따시

Le vent se leve!... Il Faur renter de vivre!

바람이 인다! …… 살려고 애써야 한다!

폴 발레리 시 <해변의 묘지> 부분


커피를 리필했다. 글을 쓰기 위한 재료다. 창밖의 풍경은 흰색이다. 어둠이 막 사라지고 있다. 붉은빛이 올라오고 있는 하늘은 푸른 회색이다. 태양은 벌써 떴을 것이다. 시야를 가로막고 있는 산봉우리를 넘어 오는데 시간이 걸리는 것뿐이다. 조금 전까지도 어둠 속에 묻혀 드러나지 않았던 건물들이 저마다의 아침을 연다. 밤새 거리를 비추던 가로등은 꺼졌고 십자가 빛은 아직 그대로다. 이 빨간빛도 시간이 되면 꺼질 것이다. 네안데르탈인의 얼굴이 서서히 눈을 뜨고 있다. -정면으로 바라다보이는 산봉우리 세 개가 눈썹과 코와 입술의 위치에서 그만큼의 높낮이로 누워있다. 뭉툭한 눈썹과 뭉툭한 코를 하고있는 네안데르탈인의 얼굴을 닮았다- 이렇게 아주 보통의 하루가 시작된다.

알람이 운다. 설정해 놓은 기상 시간이다. 알람 소리는 생각 속으로 들어가 있는 나를 현실로 데려다 놓는다. 책상 등의 조도를 높이고 쓰던 문장에 다음 글을 놓는다. 폴 발레리의 시 한 구절이 생각난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 한다.’ 내가 처음 접했던 시구는 이런 문장이었다. 지금 인용한 시구는 김현의 번역본이다. 많은 경우의 시처럼 이 문장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문장이 좋아서 가슴에 품었던 글이다.

때로 현실이 아닌 다른 세계로 향하는 경우가 있다. 화가 치밀어 오르는 순간이거나 슬픔에 겨워 몸을 가눌 수 없는 순간. 너무 기뻐서 앞뒤 분간이 안 되는 시간. 힘들고 지쳐 한없는 나락으로 깊숙하게 몸을 숨기는 시간. 이런 순간들은 마냥 계속 둘 수 없다. 현실을 살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다른 세계에서 정신 못 차리고 있는 나를 현실로 데려오는 것. 그것이 바람이다. 바람이 불 때 알아차려야 한다. 내가 다시 돌아갈 세상이 있다는 것을.

설 연휴가 끝났다. 십수 명의 손님들과 부딪히며 지낸 며칠이 힘겨웠나 보다. 몸이 쉬어야겠다는 신호를 보낸다. 마음이 마냥 들떠있을 때는 몸이 먼저 눕는다. ‘정신 차려’ 마음을 살짝 건드려 주는 바람이 있을 때 우리는 현실로 돌아온다. “바람이 인다! 살려고 애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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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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