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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어느 날

한강 시 <서울의 겨울 12>

by 따시

“어느 날 어느 날이 와서

그 어느 날에 네가 온다면

그날에 네가 사랑으로 온다면”

한강 시 <서울의 겨울 12> 부분


단어가 주는 느낌. 어느 날, 어떤 날, 그날 등을 좋아한다.

‘어느 날’ 힘없어 보이는 언어. 연두처럼 창창하지 않고, 흐린 오후의 햇살처럼 조용한. 그렇게 가만히 오는 ‘어느 날’ 그 어느 날에 찾아오는 너는 숨이 막히는 사랑. 간절한 바람이다.

전쟁 없는 세상의 평화는 내 손을 떠났다. 끝없는 색깔론의 편 가르기 정치도 내게는 닿지 않는다. 양수처럼 나를 감싸던 어머니도 어느 날 멀리 가셨다. 아이들은 너무 커서 내 곁에 없다. 모든 것은 떠난다. 떠난 후에야 올 수 있다. 그리운 것이어야 간절해진다. ‘어느 날’은 간절함이다. 도달하기는 어렵지만 꼭 당도하고 싶은 날이다. 소망과 절망이 함께 있는 마음이다. 좌절하지 않고 기다려주는 마음이다.

혹독한 겨울을 지나는 이들에게 어느 날 봄이 오고, 전쟁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어느 날

평화가 오고, 취업을 희망하는 이들에게 어느 날 합격의 문자가 온다면. 아기를 기다리는 부부에게 어느 날 선물처럼 아이가 온다면 그렇게 “네가 사랑으로 온다면” 이토록 거창한 무엇이 아니어도 좋겠다. 햇살이 따뜻한 어느 날,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는 어느 날, 오랫동안 적조했던 사람을 만나는 어느 날, 혼자 여행을 떠나는 어느 날, 흰 게발선인장꽃이 피는 어느 날. 어느 날은 이렇게 소소한 날이 되어도 좋다.

내게도 그런 어느 날이 오기를 바라본다. 세상을 향해 촉수를 뻗고 있는 더듬이를 모두 거두어들이고 그저 따뜻한 햇살 한 줌 내리는 뜨락에 가만히 앉아 있고 싶다.

숨쉬기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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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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