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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두려움을 버려라

아멜라 스파이로 와그너 <<인생을 글로 치유하는 법>>

by 따시

당신의 자아에게 항복해라. 당신의 글 때문에 당신이 멍청하게 보일 거라는 두려움, 둔하게 보일 거라는 두려움, 지나치게 열성적으로 보일 거라는 두려움, 그 밖의 모든 두려움을 버려라. 일단 항복해라. 그런 다음, 퇴고하라. 아멜라 스파이로 와그너 <<인생을 글로 치유하는 법>>


詩라는 것을 써서 타인들 앞에서 낭독했다. 읽으면서도 부끄러워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가 되었다. 한참 동안 사람들은 말이 없다. 진행자가 말을 독촉한다. ‘아~ 이렇게 형편없는 글이었나?’ 속은 타들어 가고 얼굴은 화끈거린다. 한 사람이 까대기 시작한다. “이 단어는 시에 담기에 너무 크다.” “이런 표현은 너무 진부하다.” “시에 깊이가 없다.” “시가 뭐를 말하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혹독한 평이 쏟아져 나올 때 한 사람이 말한다. “여기 이 문장은 너무 좋은데요” 분위기가 바뀐다. “그 문장이 이 시를 살렸어요” “참 신선한 문장이에요.” 자아 같은 것 없다. 쥐구멍 있으면 숨고 싶다. 살면서 이렇게 멍청하게 생각되었던 적은 없다. 다시는 詩 같은 것은 쓰지 않으리라 속으로 다짐하면서 모임을 끝냈던 기억. 몇 년 후 다시 시를 공부하기 시작했을 때 사람들은 쉽게 써내는 시를 나는 쓸 수 없었다. ‘진부한가? 단어의 부피가 너무 큰가? 깊이가 없나?’ 자기 검열은 까다로웠고 실력은 부족했다. 내 글을 읽을 사람들의 표정이, 그들의 입에서 나올 첫 감상이 두려웠다. 그때 아멜라 스파이로 와그너의 글은 내게 용기를 주었다. “두려움을 버려라. 그런 다음, 퇴고하라” 글은 독자가 있을 때 완성된다.

아무도 읽지 않는 글은 숨겨놓은 일기밖에 없다. 글은 어떤 환경에서, 어떤 시간에 읽는가에 따라서도 감상이 다르다. 독자들에게서 벗어나지 않으면 글을 쓸 수 없다. 작가는 자신이 쓰고 싶은 글을 쓰면 된다. 어떤 이는 호평을 다른 이는 혹평을 할 수 있다. 쓰는 것은 작가의 일이고 읽는 것은 독자의 취향이다. 독자는 좋아하는 음식을 선택하듯이 글 또한 선택할 수 있다. 독자의 혹평이 귓가에 먼저 들리면 글을 쓸 수 없다. 조금 멍청해 보여도 괜찮다. 둔하게 보여도, 열성적으로 보여도 괜찮다. 누군가 글을 읽고 혹평이라도 해 준다면 작가는 그것으로 글을 쓴 보람을 느낀다. 그럼에도 상처를 조금 덜 받는 방법은 글을 낼 때, ‘내 글은 형편없어. 누가 이런 글을 읽겠어’라는 자기 혹평을 먼저 하는 것일 거다. 말하자면 아무런 기대치도 없이 밑바닥에 내 글을 풀어놓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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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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