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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거기 붓꽃이 있었다

류시화 시 <붓꽃의 생>

by 따시

그리하여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 보라

그 여정 끝에 어떤 얼굴이 되었으며

어떤 상실의 이유로 사랑을 알게 되었는지를

피부가 통증을 기억하듯이

당신의 삶에 어떤 시가 남아 있는지를

해마다 오월이면 한 장소에서 꽃을 피우는 내가

귀 기울여 들어 줄 테니

류시화 시 <붓꽃의 생> 중에서


거기 붓꽃이 있었다. 곰배령을 찾았던 날 비가 내렸다. 기왕에 나선 길이었고 예약도 힘든 터라 우중 산행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산속 마을은 이미 관광지로 변모하고 있는 터였다. 멋지게 지어진 상가를 겸한 집들 가운데 한 곳에 눈길을 사로잡는 것이 있었다. 하늘 꽃밭이었다. 작은 옥상에 허공을 배경으로 붓꽃이 화려하게 피어 있었다. 비에 젖은 모습으로, 보랏빛이 화려하기도 했고, 청초하기도 했다. 도화지처럼 부윰한 배경에 솜씨 좋은 화가가 그려놓은 멋진 그림 한 점을 감상했다. 지금도 거기 붓꽃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십수 년 지난 오랜 풍경이다. 그 풍경 속에 사십 대의 풋풋한 내가 있다.

힘들고 지쳤던 삼십 대를 통과하고 아주 조금 숨을 쉬는 중이었다. 하루를 지나면 다음 날 아침이 온다는 것조차 생각하지 못하고 살았다. 자신에게로만 눈길을 주는 남편, 전형적인 사고방식의 시어머니와 시누이들. 아직 세상에 홀로 설 수 없는 아기들. 도움을 받으면서도 짐이었던 친정엄마, 허드렛일하는 일꾼처럼 모든 일에 관여해야 하는 직장일. 살고 있는 것은 나인데 어디에도 나는 없는 삶이었다. 생이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자신을 위한 시간을 내어줄 때 견뎌낼 수 있는 것 같다. 그때 나를 끌고 간 것은 무엇이었을까?

미래였다. 내일이나 모레쯤이 아니고, 내년이나 후년도 아닌 아주 먼 미래. 그때 나는 먼 미래에 만나게 될 ‘지금’을 생각했다. 은퇴 후에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를 생각했다. “몇 푼이나 번다고”라는 말로 나의 직장을 깎아내리던 남편의 말을 무시했다. “끝까지 다녀라.”던 친정엄마의 말을 핑계 삼았다. 무엇을 놓치고 왔는지는 알 수 없다. 아쉬운 것도 있지만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때 돌보지 못하고 꽁꽁 묶어두었던 내 삶을 이제 하나씩 풀어본다. “그리하여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나는 누구인지, 긴 여정 끝에 어떤 얼굴이 되었는지, 피부가 통증을 기억하듯이. 나의 삶에 어떤 시가 남아 있는지” 나는 이제부터 차곡차곡 시 같은 언어로 말해 볼 것이다. 당신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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