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이 다른 간절함-장민호의 봄날은 간다
무대에 선 한 남자, 엄.근.진
2019년 11월 18일. TV조선 <미스터트롯> 첫 녹화 날. 전국의 소리꾼들이 모여든 오디션장.
카메라에 잡힐 때마다 손하트, 윙크, 깨알 퍼포먼스로 숨쉬듯 자신을 어필하는 참가자들 사이
유독 눈에 띄는 한 남자가 있었다.
정갈한 수트, 반듯한 가르마, 꼿꼿한 자세. 마치 대기업 최종면접장에 나온 청년처럼..
엄.근.진.(엄격.근엄.진지..)
침을 삼키고, 눈을 깜박이며, 손을 쥐었다 폈다..
그 모습만으로도 느껴졌다. 절박하지만, 절박함의 결이 달랐다.
그는 이미 ‘트롯계의 BTS’라는 별명을 가진 인기 가수였지만, 무대에 오르기 전 긴장은 숨길 수 없었다.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는 모습. 그 절실함에 나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응원을 보냈다.
선곡은 의외였다.
익숙한 트롯 히트곡 대신,
다소 생소한 <봄날은 간다>.
정갈한 수트 차림과 토속적인 멜로디의 이질감.
전주가 흐르자 감이 왔다.
모 아니면 도구나.
하지만 그는, 짧지만 찬란한 봄날을 회고하는 노래 속 화자가 되어 노래를 불렀다.
그의 목소리는 서서히 깊어졌고, 마지막 대목에서 터져나온 한이 맺힌 갈성(갈아낸 듯한 음색)은
듣는 이의 마음을 내려앉게 만들었다.
<봄날은 간다>는 1953년 백설희가 발표한 곡이다.
한국전쟁을 겪은 이들의 한과 상실을 담아낸 노래.
작사가 손로원은 부산의 판잣집에서 어머니 사진을 바라보다, 불에 타버린 그 사진을 떠올리며 이 가사를 썼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그 노랫말은 개인의 아픔에서 시작되어 이후 이미자, 나훈아, 장사익, 한영애까지 수많은 가수들이 다시 불렀다.
그리고 장민호는 그 절절함을, 절박함으로 끌어올려 무대에 세웠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이건 단지 오디션 무대가 아니라 한 사람의 간절한 기회였구나.
장민호는 독기를 품고 있었다. 사납고 모진 기운이 아닌, 오래 꿈꿔온 것을 향한 절실함의 독기.
그의 무대를 보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간절함이란 저런 것이구나. 독기를 이토록 아름답게 표현할 수도 있구나.
장민호처럼 오랜 경력의 가수가 떨림을 숨기지 못하는 걸 보는데, 문득 내 취준생 때가 떠올랐다.
떨면 힙하지 않다고, 쿨해보이지 못한다고 누군가는 말했지만,
나는 늘 떨었다. 너무 떨려서, 손끝이 저릴 정도로.
그건 자신감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기회를 너무 간절히 원했기 때문이다.
MBC 공채와 제일기획을 한 번에 붙은 무한도전 김태호 PD는 취업성공비결에 대해 “심사위원을 그냥 동네 아저씨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그 쿨함, 여유, 자신감이 부러웠고, 나도 따라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 진짜 모습은
사시나무처럼 떨던 날들의 기억에 더 가깝다.
나는 장민호 쪽이었다.
누군가
"나는 왜 안 될까. 내 기회는 없는 걸까"
고민하고 있다면,
이 무대를 꼭 보여주고 싶다.
그 모든 떨림을 삼키고 또 삼킨 끝에
마침내 활짝 피어난 꽃이 여기 있다.
미스터트롯 이후 5년이 흘러.. 장민호는 더 이상 내가 손 모아 응원할 필요 없는 국민연예인이 되었다.
유쾌하고 선한 예능감, CF에서의 활력, 그리고 무대 위에서는 여전히 빛나는 발성과 눈빛. 하지만 나는 잊지 못한다.
<봄날은 간다> 무대 위, 엄.근.진 그 남자가 보여준 절박함의 품격과 진심의 독기를.
트롯은 웃고 즐기는 음악이지만, 어떤 무대는 우리를 정좌하게 만든다.
2019년 어느 날, 장민호는 그렇게 한 곡으로 사람을 멈추게 했다.
그 순간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다. 그리고 그런 무대들을, 글로 기록해두고 싶다.
트롯을 듣고, 느끼고, 기록하는 사람
유투리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