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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야 Feb 13. 2024

일상의 조르바

211121

이런 글을 써야지, 저런 글을 써야지. 산책을 하면 여러 생각들이 머리 속을 헤집고 다닌다. 아이의 신통한 모습을 그 때의 그 일이랑 연결해서 이렇게 저렇게 쓰면 이천자쯤 나오겠지. 당장이라도 책 한 권은 거뜬하게 쓸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넘쳐 흐른다. 집에 돌아오면 여러가지 일들이 나를 기다린다. 엉망인 집, 쌓여있는 설거지, 건조를 기다고 있는 빨래들. 저녁 반찬은 또 뭘해야하는지, 휴지는, 치약은 남아있는지 한꺼번에 몰려 드는 일을 겨우 쳐 내기에 바쁘다. 메모도 하지 않고 쌓인 생각들은 설거지감과 함께 비누거품처럼 사라진다. 


혼자 샤워할 시간도 낼 수 없는 엄마가 이천자를 쓸 시간을 만들 수 있을리 없다. 그나마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놀다오니 일이 쌓이고 밀리지는 않는다. 아이와 함께 해야했던 지나간 2년은 밀리고 밀리고 밀린 일들 사이에서 겨우 숨만 쉬고 살았다. 신랑이 돌아오면 밥 한 술 겨우 먹고, 겨우 겨우 눈꼽 떼고. 내가 아이 씻기고 먹이고 하는 사이에 신랑이 입을 옷, 걸을 수 있는 자리 만들어 놓았다. 글쓰기는 커녕 책읽기도 할 수 없었던 시간이었다. 그래서 그저 책을 읽을 수 있을 만큼이 되니 그걸로 만족할 따름이었다. 그 날 이전까지는.


누군가의 인스타그램 피드에 자꾸 보이던 ‘조르바북클럽’ 

‘책읽기를 굳이 이런 방식으로?’ 라는 생각이 제일 컸다. 책을 고르고 읽고 정리는 할 때도 있고, 안 할 때도 있고. 또 다른 책을 고르고. 그렇게 반복되는 내 책읽기는 돌아보니 매번 그 책이 그 책이고, 좋아하지 않는 작가는, 낯선 분야는 읽지도 보지도 않고 도돌이표. 자꾸 보이는 피드는 카네기도 읽고, 총균쇠도 읽고, 내가 안 읽을 것 같은 고전 소설도 읽고… ‘해봐?’ 그렇게 가볍게 한 선택이 2021년 최고의 선택이 될 줄이야!


지금은 매주 두 번 글을 쓴다. 북클럽에 이어 라이팅클럽도 시작해버렸다. 글쓰기를 한다는 소리에 길게 고민은 했지만, 결정 뒤 후회는 없다. 누군가 내 글을 읽어준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런데 첨삭을 해주겠대... 세상에. 눈 앞의 사람에게 첨삭을 해주는 것과 서면으로 하는 첨삭의 차이와 귀찮음 정도는 알고 있으니, 저 사람은 뭐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석달 과정이란게 조금 걸렸다. 한 번에 갑자기 나가는 목돈이라면 목돈을 내가 써도 될까?(그래봐야 신랑 하루 저녁 술값만큼 밖에 안된다.) 계획에 없었던 지출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고민했지만, 이 기회가 아니면 다시 글을 쓰는 삶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생각이 더 컸다. 그리고 역시 후회는 없다.(현재는 북클럽 참여시 라이팅클럽은 무료다.)


억지로 짜내고 끼워 맞춘 것이라도 꼬박꼬박 글 쓸 시간이 확보되었다. 그리고 충격 받았다. 이거 누가 쓴 글이야 싶게 글이 엉망이었다. 아이들에게 내가 매번 하던 말이 떠올랐다.

‘우리말도 언어라 적던 많던 매일 꾸준히 안보면 한번에 훅 간다. 1등급 올라가긴 어려워도 내려오는 건 한 순간이다.’

말만 많은 선생이었다. 아이들 과제지에 줄이나 쭉쭉 그으면서 참견이나 해댔지 내 글 쓴 지가 언젠지 기억이 안났다. 그러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내 글 여러 번 읽고 꼼꼼히 해준 첨삭지 받을 때마다 도망치고 싶어서 미룰 수 있을 만큼 미뤘다가 확인했다. 쓰고 나면 나조차 다시 보지 않는 내 글들을 남에게 보이는 것이 부끄러웠다. 하지만 다시 읽는 순간 알 수 있다. 읽기를 잘했다. 수두룩한 고치면 좋을 부분이었지만, 그렇게 고치고나면 더 마음에 드는 글이 나왔다. 


매 주 라이팅 멤버들이 모여서 글을 쓴다. 각자의 스케줄에 따라서 들어오는 멤버들은 다르다. 나는 100% 참여를 목표로 한다. 재미있으니까. 글을 쓴 본인들의 개성이 뚜렷한 글을 보는 게 재밌다. 멤버 A는 차분한 글을 쓴다. 아이에게 소리도 못 지를 것 같은 목소리로 잔잔하게 일상을 이야기한다. 본인은 횡설수설이라며 마음에 안든다는 투로 이야기 하는데, 일상의 한 면을 조용하고 단단하게 그려 내는 게 부럽다. B는 경쾌하다. 글 속에서도 연둣빛과 레몬빛이 교차하는게 느껴진다. 밝고 시원한 5월, 6월 햇살 같은 글을 쓴다. 한번도 그렇게 밝은 글을 써보지 못했다.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쓰지 못할 것이다. 글은 사람을 닮는 법이니까. C는 크리스마스 같은 글을 쓴다. 짠하고 즐거운 선물을 보여준다. B의 명랑함을 가지고 있는데 조금 다르다. 살짝 지쳐 있다. 아주 살짝. 크리스마스 선물 고르느라 기운 빠진, 그럼에도 포장을 여는 아이를 보며 웃는 부모의 얼굴 같은 글이다. 더 즐거운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육아의 피곤함이 그녀를 붙잡는 것 같다. D는 의외의 참신성이 있다. 그녀의 곱게 접혀 예쁜 눈웃음처럼, 햇볕에 잘 말린 솜이불 같은 폭삭한 글을 잘 쓴다. 알아서 더 정겹고 행복한 내음 풀풀 풍기는 글이다. 그런데 그 와중에 뾰족 튀어나오는 의외성이 색달라서 놀랍다. 그것조차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매력이 있다. 다들 이렇게 자신의 색을 잘 보여주니 나는 참 즐겁다.

 

건강하고 따뜻한 사람들의 글이라 더 좋다. 나 글 좀 쓰네 하는 사람들 중에는 자신에게 너-무 심취한 사람, 나는 어쩔 수 없는 아픔이 있네 하는 사람, 글 쓰는게 특별한 일이라도 되는 양 거들먹거리거나 우울을 무기로 삼는 사람 등 별 꼴보기 싫은 사람들이 한 가득인데 우리 중에는 없다.(난가?) 다들 착실히 자기 삶을 살고, 주변을 챙길 줄도 안다. 너무 좋다. 잘 쓴 글에서 오는 즐거움은 책을 사 읽으면 된다. 조금씩 더 괜찮아 지는 글을 보는 즐거움은 같이 글을 쓰고 나누는 사람들만 알 수 있다. 그러니 100% 참여를 목표로 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매주 글을 써야하는 이유가 생겼다. ‘언젠간 써야지.’와 ‘에잇, 쓰자.’는 다르다. 내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에잇, 쓰자.’ 쪽이 낫다. 이랬든 저랬든 글 하나가 저장되니까. 몇 년간 언젠간 써야지 했던 글감들을 꺼네고 있다. 시간도 지났고, 그 사이 나의 감정도 변해서 그 때의 심정으로 글을 쓰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그 때, 어떻게든 시간을 내서 글을 썼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흐른다. 그 생각을 다음 2년 뒤에 또 해서는 안되니까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려 본다.


여러 변화가 있었지만 그중 제일은 내 시간이 너무 잘 간다는 것이다. 어제 신랑과 이야기하다가 벌써 11월도 10일밖에 안남은 걸 알게 됐다. 북클럽 시작하고 시간이 빨리 흐른다. 남아 있는 ‘코스모스’가 3분의 1이 채 안되고, 이 달 두번째 책인 ‘사랑’도 끝 몇 장만 남았다. 곧 12월 선정도서가 나올 것이다. 북클럽 1차 도서, 2차 도서. 한달이 그렇게 채워지고 있다. 한 주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월요일에 내 글 하나 쓰고, 화요일에 맞춤법 하나, 수요일에는 북클럽 리뷰쓰고, 목요일엔 라이팅클럽 글 쓰고, 금요일엔 북클럽 줌팅, 토요일엔 아이와 도서관, 일요일에 또 라이팅클럽. 아, 하루는 새벽독서실로 시작한다. 몇 달 이렇게 살았더니 이 리듬이 깨지는 게 싫다. (친정 가는 것도 귀찮다.) 내 시간이 너무 잘 가니 아이에 관한 쓸데없는 걱정을 하지 않는다. 내가 아이의 학습에 집착하지 않을까 신랑과 가장 크게 걱정했던 것인데 그럴 시간이 없다. 오늘도 아이가 해달라는 글자공부보다(요즘 부쩍 글자에 관심을 가진다.) 밀린 ‘코스모스’가 먼저다. 그 전에 이 글부터 마무리하자. 


아이 엄마, 신랑의 조력자가 아닌 나의 쓸모와 가치를 인정받고 싶어했던 날들이 길었다. 월급 봉투가 가장 빠르고 정확한 방법이지만, 발목 잡는 여러가지가 많았다. 그중 컸던 것은 아이. 조금만 더 커도 엄마따윈 필요없어 할테지만, 아이의 문제로 월급주는 사람에게 싫은 소리 하고 싶지도 싫은 소리 듣고 싶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나의 희생으로 신랑이 마음 편하게 일하고, 아이가 걱정없이 자란다 고 말하는 것은 더 싫었다.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무엇이든. 그날 북클럽을 신청하고, 그날 라이팅 클럽을 신청한 것은 다시 생각해도 올해 최고의 결정이었다. 책을 읽는 것도, 글을 쓰는 것도 혼자서 잘 할 수 있었겠지만(진짜?), 선하고 따뜻한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어서 더 더 좋다. 내년에도 조르바님에게 새로운 사랑이 나타나질 않길 몰래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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