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꽃 감자와 여문 옥수수
옥수수 알갱이가 제법 여물기 시작하면, 솥에 스무 개쯤 따다가 쪄 내도 우리 다섯 남매에게는 항상 부족했다. 그중에 통통하게 여문 옥수수를 먹고 싶어 눈치를 보며 군침을 흘렸지만, 할머니는 늘 오빠에게 주셨다.
못난이 옥수수들만 우리 손녀딸들의 몫이었다. 그것이라도 하나 더 주시면 그리 행복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알갱이가 꽉 찬 오빠의 옥수수에 눈길이 자꾸 가는 것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인생의 불공평함에 대해 일찍부터 깨닫고 자랐다. 누가 나에게 '식탐이 있다'라고 하는데, 그건 다 우리 할머니 탓이다.
할머니는 밭에 가실 때, 주로 나와 여동생을 데리고 가셨다. 우리는 콩쥐가 호미질을 하듯이 일심으로 팥쥐 오빠를 흉보면서 밭일을 도왔다. 호미 끝에 있는 감자 구근의 줄기를 잡아 힘껏 당기면 주렁주렁 감자 알갱이들이 넝쿨째 모습을 드러냈다. 그때의 감흥이란 말할 수가 없다. 아파트 화분에 감자심기라는 프로젝트를 시도하다 포기했다. 역시 땅에서 키우는 감자가 최고다.
하지 감자, 여름 한낮에 하지감자를 껍질째 찌면 껍질 사이로 뽀얀 속살이 여기저기 드러난다. 껍질을 벗겨 반으로 가르면 폭신한 감자가 사르르 부서져 내려 '여름의 눈꽃' 같이 쌓인다. 첫 아이 입덧 때는 한 겨울이었는데, 바로 '그 어릴 적 맛보았던 포근포근한 하지감자'가 너무나 먹고 싶어서 힘들었다.
감자를 캐다 지치면, 할머니가 싸 오셨던 간식을 먹었다. 그리고 밭 가장자리에 줄지어 있는 것 중 적당한 옥수숫대의 줄기를 벗겨 그걸 쭉쭉 짜 먹었다. 옥수수 줄기는 다소 거칠어서 즙을 짜 먹다 입안에 상처가 나기도 한다. 수숫대의 줄기보다 덜 달지만 노동의 대가로 충분히 맛있었다. 옥수수수염을 머리 모양으로 땋아 동생 머리에 걸어주고 희희덕거리기도 했다.
어린 시절 옥수수나 수수의 줄기를 벗겨내 빨아먹던 일화를 이야기하면 우리 딸들은 믿지 못한다.
몇 해 전에 대만에서 훠궈를 먹었는데, 곁들이 요리로 마치 오이 썰어 놓듯이 사탕수수가 썰어져 있었다. 훠궈의 맵고 강한 맛에 단 맛의 사탕수수가 아주 잘 어울렸다. 그러나 사탕수수 주스는 당도가 너무 강해서 한 모금 마시니 더 이상 마시기 힘들었다.
사탕수수가 아무리 달고 맛있다 해도, 강하지 않으면서 은은한 수숫대와 옥수숫대의 맛을 잊기는 힘들다. 우리 집은 아궁이가 있었고 옥수숫대는 아궁이의 불쏘시개로도 사용되었다.
현대인에게도 옥수수 부산물은 그 쓰임새가 다양한데, 옥수수를 먹고 남은 옥수수 속을 잘라 삶은 후 그 물로 입안을 자주 헹구면 치아에 아주 좋다고 한다. 또한 옥수수수염으로 차를 만들어 마시면 간, 신장에 이롭다고 한다. 일전에 고마운 친구가 옥수수수염을 모아 말려 주었다. 여름이 끝나면, 싱싱한 옥수수와 하지 감자의 계절도 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