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둘 가고 싶은 곳이 생겼습니다.
내 나이가 어느덧 마흔둘이다. 어느 순간, 더 나답게 살고 싶어 퇴사를 결심했다. 무모할지 모르지만, 해보지 않으면 살아온 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싫었다.
혼란과 설렘, 불안과 희망 사이에서 삶의 어떤 계기를 마련하고 싶었다. 정리해야 할 것이 있다면 정리하고 싶었고 더 가벼워지고 싶었다. 이런 인생의 전환점에서 필요한 것이 히말라야 같았다.
스물한 살에 나는 멋모르고 인도로 배낭여행을 갔었던 적이 있었다. 그것도 40일이나. 그때도 계획은 없었다. 델리로 들어가 델리로 나온다. 그리고 여행기간은 40일. 그 외에는 여행지에서 정한다. 이런 무모한 계획을 가지고 무작정 떠났다. 그리고 발길 닿는 대로 가다 보니 다람살라였다. 티베트 망명정부가 있다는 맥그로드 간즈에서 30일을 있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음식이 입맛에 맞다는 것과 눈앞에 보이는 높은 설산이 좋았다. 높은 산 사이에 지어진 집 옥상에서 뜨거운 햇살을 받으며 마시는 짜이는 일품이었다.
어느 날 설산 사이로 붉은 해가 져 가고 있었다. 나는 숙소 방문 앞에 앉아 몇 시간이고 지는 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에 내 가슴속에서 지독한 그리움이 번져 나갔다. 무엇인가 잃어버린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다.
어렸을 때 ‘차마고도’라는 다큐멘터리가 있었다. 황량하지만 드높은 고원지대에서 사는 티베트인들의 삶을 보며 그때에도 같은 그리움을 느꼈었다. 그 뒤로도 히말라야가 나오는 다큐를 좋아했다. 산새가 너무 깊어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주어진 자연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사는 모습들이 좋았다. 해가 뜨는 새벽에 일어나 농사를 짓고, 자연에서 주어진 것으로 밥을 하고 해가 지면 별과 함께 잠드는 그들의 모습이 아름다웠다.
밤새 제안서를 쓰고 피로에 찌든 어느 날 그런 의문이 들었던 것 같다. 누가 더 인간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는가? 고시원 방 한 칸에 빛도 없이 사는 나인가? 아니면 말린 소똥으로 불을 때우고 거친 바람에 볼 살이 부르터도 경이로운 산들에 둘러싸여 기도하며 살아가는 저들인가? 진정 가난한 것은 누구인가? 좋은 옷을 입고 따뜻한 고시원 한편에 서라도 자는 나인가? 아니면 쏟아지는 별 아래에서 따뜻한 차 한잔에 몸을 녹이는 저들인가? 우울함을 이불 삼아 덮고 자는 내가 더 불행한가? 아니면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미소 짓는 저들인가? 답도 없는 물음들이었다.
나에게 히말라야는 영적인 곳이다. 진정한 삶에 대한 그리움을 주고 대자연의 경이로움을 알게 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눈 덮인 설산, 그 속으로 들어가 위대한 자연이 만들어 놓은 경이로움을 직접 보고, 만지고, 느끼고 싶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십 평생이고 지고 살아왔던 이유 모를 원망, 미움, 서러움 같은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싶었다. 그리고 가벼워진 마음으로 죽을 때까지 삶의 아름다움 하나하나를 더 깊고 진하게 느끼다 가고 싶었다.
그 시작을 위해 히말라야는 최적의 장소 같았다. 하루 7-8시간을 걷는다는 것도 좋았다. 매일 같이 걸으며 내면의 깊은 곳에 숨겨진 진정한 나 자신과 체력의 한계까지 한번 마주해 보고 싶었다. 마치 오체투지를 하듯이. 히말라야의 산행은 나에게 어떤 영적 성장의 계기를 안겨 줄 것 같았다.
하지만 과연 이런 의도가 패키지여행으로도 달성될 수 있을까? 솔직히 떠날 때에는 확신이 없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