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속도와 완결성에 사로잡혀 있었다. 지금껏 신속하고 정확하게 일을 처리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겨왔다. 그것이 나를 여기에 있게 해주었을 테지만, 저지른 실수에 관대하지 못한 태도를 심어주기도 했다. 더 잘할 수 있다는 긍정은 일을 추진하는 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실제로 여러 개의 일들을 수행해가면서 몸은 녹초가 될 수밖에 없다. 잘했다는 칭찬과 잘하고 있다는 믿음이 심신의 건강까지 책임지지는 못한다.
“잘했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맡은 일을 더 잘하고 싶었다. 일들이 점점 늘어나는데 더 잘하기 위해 몸을 혹사시켰다. 아무리 집중을 해도 매번 실수가 발견되었다. “다음에 잘하면 되지”나 “이건 실수도 아니야”라는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실수를 했다는 사실은 목구멍에 걸린 생선 가시처럼 쉬 내려가지 않았다. 잃어버리거나 잊어버린 것에 대해 자책하는 시간은 길고도 짙었다. 언제인가부터 밤은 늘 후회하는 시간이었다.
속도와 완결성의 끝을 생각한다. 속도의 끝에는 머무름이 있을 것이다. 완벽함의 끝에는 여백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머무르고 비우는 일은, 다름 아닌 천천함에서 비롯한다.
출처 오은, 「천천한 생활」, [직설], <경향신문> http://m.khan.co.kr/amp/view.html?art_id=201808272030005&sec_id=990100&art_id=201808272030005&__twitter_impression=true
나이가 들면서 점점 실수를 못 견뎌하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내가 맡은 편집 일이란 게 잘하면 당연한 일이지만, 못하면 그런 나의 존재가 드러나고야 마는 일이라 더 그렇다.필자의 글을 예쁘게 편집해 누가 봐도 멋지게 출간했을 때, 나의 만족도는 그 어느 때보다 크다. 그러나 내가 만족하지 못하면 필자에게도 누가 되는 일이기 때문에 그 생각을 하면 며칠 동안 앓게 된다. 최근에 이런 일이 있었다. 마감은 닥쳤는데 여러 사정상 데이터를 넘기는 일은 차일피일 늦춰졌고 발행일이 나의 목끝을 조르니 그냥 내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분명 세심하게 더 정성을 쏟지 못한 내 탓이라는 생각에 왈칵 눈물이 날 뻔했다. 웃기는 건, 정작 필자님은 만족하신다는데 나는 만족을 못해 몇 날 며칠 우울해하고 끙끙 앓았단 거다.
세차게 앓고 다시 한번 그 글을 마주하니 처음보다는 불만족스럽지 않았다. 모든 일에 여유가 필요하듯 사람의 마음에도 그러하다. "급할 수록 돌아가라"는 내가 일할 때 가장 자주 쓰는 말이었는데 그러고 보니 요즘엔 그 말을 잊고 산 것 아닌가 싶다. 문득 인상 깊게 읽었던 오은 시인의 칼럼이 생각났다. 「천천한 생활」. 오늘은 나도 오은 시인처럼 "천천한 생활"을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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