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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찾는 은퇴자

은퇴하고 자유로운 시간이 내 앞에 펼쳐졌다. 그야말로 대양과 같은 자유시간이다.

나에게 시간이 많다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며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직장은 내가 하고 싶은 일보다는 해야만 하는 일 위주로 돌아갔기에 어릴 적 가졌던 꿈을 펼치기에는 어려운 공간이었다.


현명한 은퇴를 위해 여러 가지 조건들이 필요하겠지만 나는 재테크보다 어쩌면 시간을 관리하는 것이 은퇴자가 가져야 할 전제 조건이 아닌가 생각한다.

처음에 내 앞에 놓인 많은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지 큰 고민을 하지 않았다. 그간의 일상이 너무 팍팍했기에 무조건 쉬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고단했던 나의 삶을 위로하기 위해 풍광 좋은 곳으로 여행도 다녀와야 했고 해보지 못했던 일이나 만나지 못한 사람도 만나야 했다.

그 모든 것은 가능했다. 나에게 남은 것은 시간밖에 없었으니까.



두 번의 여행을 다녀온 후에 절은 날처럼 여행이 그리 즐겁지 않고 집을 떠나 객지에서 부대끼는 것이 생각보다 힘겹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 나보다 앞서 직장을 떠난 분들이

“여행도 하루 이틀이지, 그게 늘 즐거운 일은 아니야. 그리고 우리 삶이 여행만 다닐 수는 없거든”이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은퇴자 대부분은 직장을 그만둔 후, 자유롭게 여행을 다니는 일상을 최고로 꿈꾼다. 직장에 매여 분초를 다투고 자유롭게 시간을 쓰지 못한 것에 대한 목마름의 표현이기도 한 여행은, 이미 경험해서 아시겠지만 집을 떠난 순간부터 집으로 다시 돌아오기 위한 과정이 아닐까 싶다.


가보지 못했던 장소를 방문하고 새로운 문물과 풍경을 접하고 그 아름다움에 도취된다 해도 여행은 일상이 아니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하루를 살아가는데 최적화되었기 때문에 풍선처럼 하늘로 날아오르는 여행의 나날도 좋지만, 땅을 밟으며 주변의 것을 바라보며 사는 일상에 더 익숙하다. 어쩌면 그런 하루하루가 우리 인생의 전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우리는 여행을 위해 계획을 짜는 만큼 하루의 평범한 삶을 살기 위해 계획을 세우진 않는다.

평균수명이 늘어 어쩌면 예상보다 더 길어질지도 모르는 은퇴 이후의 시간을 위한 세밀한 계획이 없는 편이다.

은퇴 이후 나도 마찬가지였다. 매일 반복되는 하루는 그냥 무심히 흘러갔다. 일주일이 빠르게 사라지고 한 달, 두 달, 시간은 손가락 사이 모래처럼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무엇을 해야 할지,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세밀한 계획이 없었던 나는 그제야 남은 시간을 가늠해보며 고민하기 시작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그동안 하지 못했던 운동을 한다거나 그림을 배우거나 좋은 강연을 찾아다니며 시간을 보내는 친구들이 보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예전에 이루지 못했던 꿈을 이루고 싶어서 무언가를 배운다고 했다.

나는 내 앞에 펼쳐진 시간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주어진 24시간. 어떤 사람을 그 기간을 촘촘하게 자기가 원하는 색으로 물들이고 어떤 사람은 아무 색도 칠하지 않는다. 무슨 책을 칠할지, 어떻게 구성할지에 대한 계획이 있어야 함을 나는 다시 깨달았다.


아, 은퇴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시간을 보내는 일이구나.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에 대한 계획이 없다면 은퇴 이후의 삶은 무기력한 시간이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나를 덮쳤다.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피는 게 제일 중요하다. 남들이 하는 것을 다 따라 하면 그나마 부족한 시간을 낭비하게 마련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제대로 된 글을 쓰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가졌던 나의 꿈을 은퇴 후에라도 실현하기 위해 하루를 쪼개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여태껏 혼자서 글을 써온 나로서는 같이 글을 읽고 독려해줄 친구가 절실했다. 인터넷을 검색해 쓴 글을 읽고 합평할 수 있는 모임을 찾아서 들어갔다.

거기에는 다양한 색깔을 가진 문우들이 있었다. 저마다 자신만의 독특한 글쓰기를 장착하고 있는 모임. 그 모임에서 나와 결이 비슷하고 글을 보는 눈이 또렷한 이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같이 읽어주고 다른 사람의 글에 대해 다정한 합평이 이어지는 시간이 참 좋았다. 내가 원하는 삶이 이런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이제는 아침에 일어나 우왕좌왕하지 않는다. 정해진 순서에 따라 글을 읽고 쓰며 하루를 시작한다. 글이 막히면 동네 산책하러 나가거나 차를 마시며 머리를 식힌다. 은퇴 후에 내가 원했던 고요하고 평화로운 시간이 바로 이런 것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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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일을 하기 위해 기꺼이 시간을 낼 때 삶의 색깔과 향기가 바뀐다. 은퇴 전에 자기가 정말 좋아하는 것이 무언지 찾고 그를 위해 준비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곧바로 꿈을 향해 나가는 길이 정말 중요하다.


그랬다. 은퇴는 준비한 자가 행복하게 맞이하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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