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화제의 대상이 되고 스승의 날이나 크리스마스가 되면 편지와 꽃을 수북하게 받는 선생님이 있다. 그들의 공통점은 아이들과 눈높이를 같이 하고 한명 한명 이름을 불러주듯 챙겨주며 아이들의 필요를 적절하고 적확하게 채워준다. 거기다 나이까지 젊어 아이들과 소통을 잘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 아이들이 그런 선생님 주변을 맴돌며 눈이라도 마주치고 한 번이라도 선생님과 말을 나눠보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면 귀여워서 웃음이 나온다.
학교를 옮기고 보니 역시 국어과 중에서 내가 제일 나이가 많았다. 10여 년 전 자기 원래 교과를 버리고 새로 1년간 연수를 받아 진로 교사로 자리를 옮기는 것이 유행처럼 번진 적이 있다. 그때 나를 아끼는 교감 선생님이 진로 교사로 옮겨 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어보셨다. 아마 나이가 점점 들어가는 후배 교사가 힘겨워하는 모습에 그 말을 하신 것이었을 텐데 나는 내가 가르치는 이 과목이 좋아서 옮길 생각이 전혀 없다고 말씀을 드렸던 적이 있다. 그러나 옮기는 학교마다 나이가 제일 많은 그룹에 속하고 무엇보다 아이들과 소통하는 것이 점점 힘들다고 느껴질 때, 그때 일이 떠오르곤 한다. 그러나 다시 그 시간으로 돌아가 똑같은 입장이 되어도 나는 내 과목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교사로서 시간이 가며 제일 어려운 일은, 아이들과의 ‘소통’이다. 수업도 할 수 있고 상담은 오히려 깊이 있게 그들의 문제를 짚어줄 수 있는데 소통 문제는 그렇지 않았다. 나로서는 챙겨주고 관심을 가진 거였는데 학생 편에서는 간섭이고 오지랖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자유를 주며 그대로 두면 아이들은 기막히게 교사의 방임을 지적했다. 간섭과 방임의 중간 지점에 아이들과 속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어떤 지점을 찾기가 너무 어려웠다. 아이들이 저절로 달려오던 젊은 시절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던 일이라 나이 탓인가 하는 생각이 앞섰기에 소통을 위해 상담 연수도 일 년간 방학을 반납해 들으러 다녔고 눈높이를 맞추려 당시 유행하던 개그콘서트도 챙겨 보았다. 말하자면 겉으로는 유유자적한 모습을 보이나 물밑에서는 온 힘을 다해 헤엄치고 있는 오리의 모습이랄까. 하지만 시간이 가도, 개콘을 아무리 봐도 나아지는 것은 없었다. 옆자리의 선생님들은 아이들과 사이도 좋고 반 관리도 매끄럽게 잘하고 진로지도도 척척인데 나만 맹숭맹숭한 담임이어서 한동안 아침마다 학교에 오는 일이 즐겁지 않았다.
어느 날 아침, 평소보다 일찍 출근해 학급 창문을 미리 열어놓으려고 들어간 나는, 서너 명의 여자아이들이 모여 화장하는 장면을 발견했다. 그중엔 우리 반에서 제일 공부도 안 하고 지각, 조퇴를 밥 먹듯 하며 규칙을 어기는 건 다반사고 그 문제를 지적이라도 할라치면 반항적으로 나오는, 화장은 풀 메이크업으로 하는 아이가 끼어 있었다. 말이 풀메이크업이지 키메라를 방불케 하는 눈화장에다 볼 터치를 너무 강하게 해서 피에로 같은 표정을 하고 다니는 아이였다. 화장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좀 연하게 해도 저런 얼굴은 아닐 텐데, 그 애를 볼 때마다 한마디 하고 싶은 마음과 제멋에 사는 걸 누가 뭐랄 수가 있나 하는 마음이 교차하며 착잡했다.
아침 일찍 학교에 와서 화장이라니. 남들은 일찍 오면 책을 펴고 한 자라도 더 공부하지 못해 안달인 아이들도 있는데. 책상을 옹기종기 모아놓고, 사실 어제 칼같이 줄을 맞춰 놓은 책상을 흩트린 것도 기분이 안 좋았는데 거기다 화장품과 휴지를 잔뜩 늘어놓고 분칠을 해대고 있는 것 아닌가 말이다. 평소 같았으면 욱하는 마음이 올라와 일장 훈시를 늘어놓았을 텐데 그날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얼마나 중요한 일이면 이런 꼭두새벽부터 학교에 나와 저렇게 열심히 화장할까에 생각이 미치자 나를 보고 미적미적 파우치를 챙기는 애들에게 어려서부터 너무 진하게 화장하면 피부 버리니 적당히 해라, 되도록 화장품은 좋은 거 쓰고라는 말만 하고 나왔다. 조회가 끝나고 쉬는 시간에 화장을 진하게 하는 ‘풀메(별명)가 나에게 왔다.
무슨 일이니?
늘 나를 보러 오는 아이들은 문제가 있어서 온다. 자기의 문제건 집안일이건 친구 관계건 뭔가 깨지고 부서진 상태에서 나를 만나러 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굳이 교무실 문을 열고 들어와 나를 만나러 올 이유가 없다.
선생님, 아까 애들 있는 데서 왜 야단 안 치셨어요?
내가 야단쳤어야 했니? 야단맞을 짓을 했다고 생각하는 거니?
아니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아침부터 책상 옮기고 청소된 교실을 어지럽혀 놓았잖아요. 거기다가 딴 반 애들까지 와서 화장하고 있었으니 당연히...
그래, 그건 좀 속상하더라. 화가 난 게 아니라 속이 상했던 거지. 어제 청소 당번이 힘들게 줄을 맞춰 놓고 간 건 왜 그랬을까? 오늘 아침에 깔끔한 상태에서 하루를 시작하고 싶었던 거 아닐까? 그런데 교실이 어제와 달리 마구 흐트러져 있으면 아침부터 기분이 안 좋아졌겠지? 그걸 생각하니 속이 상했던 거야.
그니까요. 그런데 왜 아무 말도 안 하신 거죠? 그 정도면 뭐라고 야단치실 줄 알았거든요.
그래. 이미 네가 교실에서 판을 벌였는데 내가 화를 낸다고 그 상황이 없어질까? 오히려 내가 화를 냈다면 오히려 니 입장이 난처했겠지. 니 친구들한테 면이 서지 않았을 거 아니니?. 아침부터 니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어. 속이 상한 건 나 하나로 족하다고 생각했거든.
그니까요. 사실 그게 정말 감사하더라고요.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신 거. 제가 공부에는 취미가 없는데 미용에는 관심이 많거든요. 사실은요 저, 지난달부터 메이크업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어요. 근데 요즘 학원 숙제도 많고 이번엔 다른 사람에게 화장하는 모습을 찍어서 학원 홈피에다 올리는 숙제가 있었어요. 그래서 아이들에게 화장 강습을 하고 있었던 건데. 할 수 있는 장소가 교실 말고는 마땅치 않아서 그것 땜에 친구들에게 일찍 나오라고 했는데 거기다 혼까지 났으면 제 입장이 참 안 좋을 뻔했어요. 어쨌든 감사해요. 선생님.
여간해서 웃지 않는 아이가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내 손을 잡을 때, 속에서 뭔가 울컥 솟아올랐다. 노력한다고 했지만, 그동안 아이들을 대할 때 그 자체로만 보지 않고 나의 편협한 가치관, 엄격한 교육관, 융통성이 없는 규칙에 기반하여 아이들을 평가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미 내 마음에 그 아이에 대한 부정적 판단을 마친 채로 바라보는데 그 아이가 좋게 보이겠는가. 그러면 내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뻔하다. 잔소리 아니면 평가와 비판이 난무할 터. 집에서 엄마한테 쉴 새 없이 잔소리를 듣는 아이들인데 학교에 오면 또 다른 엄마가 있어 같은 말을 듣는다고 상상해 보라. 아무리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해도 통제는 사랑이 아니며 그렇다고 관심도 아니다. 누구든 타인 앞에서 자신의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하는 법이다.
그날 이후, 그렇게 어려웠던 우리 반 ‘풀메’와의 관계가 눈 녹듯이 풀어졌고 그걸 계기로 나는 아이들을 조금 더 세심히 관찰하고 나의 도움이 필요할 때만 반응하기로 했다. 섣불리 미리 아는 척을 하거나 교사의 지시나 훈계, 설익은 조언으로 한 아이의 인생행로가 변화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리라. 다만 힘들어하는 모습이 보일 때 슬쩍 지나가는 말로 ‘너 자신을 믿어 봐’라고 말해 주거나 뭔가를 말하고 싶다고 상담을 요청하면 학교 앞 떡볶이집에서 깜짝 미팅을 하기도 한다.
예전처럼 부모나 교사가 경험에서 우러나온 지식을 전달하던 시대는 지난 듯싶다. 그런 지식은 인터넷에 검색어만 쳐도 넘쳐나고 내용도 더 자세하고 실제적이다. 그러니 누군가에게 나의 지식이나 경험을 욱여넣는 일은 상대방이 원치 않는 경우 폭력이나 마찬가지다. 어쩌면 교사가 해야 할 일은 늘 밝게 웃어주고 힘들 때 토닥여 주고, 길을 잃었을 때 바로 찾아주는 것이 아니라 찾도록 기다려 주고, 울고 싶을 때 울게 하고, 할 말이 있을 때 들어주고, 스스로 길을 찾아가도록 안내하는 그것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