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일요일 또는 예술가 Nov 25. 2024

다시, 호야꽃을 생각하며

2019년에 학교를 옮겼다. 퇴직 전 마지막 학교였다.


분주했던 3월 어느 날 내 앞으로 택배가 왔다. 보낸 사람은 없는데 받는 사람은 내 이름이라 어리벙벙하다가 내 앞으로 온 것이니 열어보기로 했다. 상자를 조심스럽게 개봉하고 네 개의 작은 화분에 옹기종기 담겨있는 식물을 보는 순간, 너무 귀엽고 싱그러워 교무실에 있던 사람들이 탄성을 질렀다. 화분을 조심스레 꺼내 중앙 탁자에 진열하니 오고 가는 사람들이 좋다고 한마디씩 한다. 

    

3월 옮긴 학교에서 즐겁게 지내라고 아는 선생님이 보낸 것을 나중에 수소문해서 알게 되었다. 그녀의 마음 씀에 감격하며 화초를 가지런히 정리해 물을 주고 쓰다듬어 보았다. 네 종류의 식물은 해가 잘 들지 않는 교무실에서 자라다가 방학을 맞아 집으로 가지고 갔다. 잘 기르려 했지만 세 개는 잘 자라지 않고 하나만 남았는데 그게 호야였다. 워낙에 작은 아이이기도 했지만, 호야는 빨리 자라는 편이 아니다. 오래도록 길렀는데 어느 날 조금씩 몸피가 커졌다. 줄기도 길게 길게 늘어져 바닥을 기었다. 바닥을 기는 모습이 징그러워서 작정하고 가위질했다. 나중에 들으니 그 줄기에서 꽃이 핀다는 것이 아닌가. 아뿔싸. 나는 꽃이 필 단계의 호야에게 무슨 짓을 했단 말인가. 후회막급이었지만 일은 이미 그르친 뒤였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줄기를 어루만졌다. 손끝에서 식물은 미안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2024년 기른 지 5년이 되는 봄, 호야는 드디어 꽃을 피웠다. 사진을 찍어 감격을 표현하였는데 다들 귀한 꽃이라 했다. 기분이 좋았다.    


      

6월 하순에 화초에 물을 주다가 호야꽃 봉우리가 올라온 것을 보았다. 아직 피기 전의 모습과 핀 꽃이 동시에 눈에 들어왔다. 이럴 수가. 이 꽃은 대체 일 년에 몇 번이나 꽃을 피우는가. 3월에 기쁨을 주더니 6월에 놀라움을 선사한다. 보기 힘들다는 꽃을 일 년 사이에 두 번이나 보다니. 5년이란 시간이 꽃 사이에 녹았다.

처음에 작고 어리기만 하던 식물이 잎이 커지고 단단해지며 제 몫을 해낼 때까지 시간이 필요하다. 나는 그저 물을 주고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렸는데 그사이에 조금씩 멈추지 않고 자라온 식물을 생각하니 감격스럽고 고맙다. 그 사이에 꽃을 보려고 달리 무언가를 시도했어도 실패로 돌아갔을 거다. 꽃은 시간이 흘러야, 제 나름의 성장기를 거쳐야 피는 것이다.   


       

내가 있던 학교도 그랬다. 올망졸망한 아이들이 들어와 청년이 되어 나간다. 그 시간 동안 아이들은 자란다. 금방 자라지 않는다고 애를 태우던 시간이 많았다. 눈에 보이는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나무라고 질책하는 사이에 관계가 허물어졌다. 때로 아이들은 자라는 것을 멈추고 방황하기도 했다.    

 

나는 요즘 기다림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거기에 ‘한없는’이란 수식어를 보탠다. 

학교에 있을 때는 뭐가 그리 바빴는지 아이들을 기다리지 못했다. 기다렸다고 생각했으나 그건 찰나의 호흡에 불과했다. 흙 속에 스스로 뿌리를 내리고 물과 양분을 구별하며 빨아올리는 시간을 간과했다. 

성장에는 시간과 기다림이 필요하다. 우리의 ‘빨리빨리’ 문화가 교육에는 적용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느리게 주변을 돌아보며 걷는 사유의 시간이 교육에 필요하지 않을까. 

내가 호야꽃을 보기 위해 식물을 키운 것은 아니다. 시간이 가고 꽃이 필 만한 여건이 되니 꽃은 스스로 핀다.


스스로 꽃 피울 시간을 기다려주는 것, 나는 그 마음을 지금에 와서 새삼 느끼고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