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가수 황가람이 부른 <나는 반딧불>이란 노래가 20대 청년을 넘어 전 국민을 울린 노래로 거론되고 있다. 사실 그 노래는 <중식이> 밴드가 부른 노래이다. 9개월 전에 그 노래를 듣고 정말 잘 만든 노래라고 감탄했다. <중식이> 밴드의 음색이 가슴을 파고들었음은 물론이다.
노래를 들으며 나는 k를 떠올렸다.
나의 머릿속에는 그동안 나를 거쳐 갔던 아이들의 모습이 박제되어 있다. 가끔 그것들을 털어내고 싶지만, 오히려 더 각인되는 느낌이 강하다. 그렇다면 그걸 풀어내 보자고 생각하게 되었다.
k는 중학교 시절부터 잘 나가던 학생이었다. 고등학교 첫 시간에 만났을 때 자신감이 넘치고 모든 일에 의욕적이었다. 요즘 중학교에서는 자유학기제라 해서 한 학기 동안 자신의 꿈과 적성을 찾기 위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이 기간에는 이른바 정규 고사인 중간, 기말고사를 치르지 않는다. 아이들의 성적은 과정 중심 평가인 수행평가를 치르고 생활기록부에 기록한다. 자유학기제를 경험하고 고등학교에 온 학생들은 이전과는 조금 다른 측면이 있다. 물론 한 학기에 불과하지만, 시험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신의 진로를 개발하고 성장하는 데 중점을 두기에 자신을 깊게 파악하는 시간을 가질 수도 있다.
자기 생각을 거침없이 표현하고 친구들과 관계도 나쁘지 않고 적극적인 k의 중학교 성적은 좋았다. 이런 성적이라면 고등학교에 와서도 충분히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 k는 반장 선거에 도전했고 그 화려한 말발과 적극성에서 몰표를 얻어 반장이 되었다.
수업 시간에 열심히 듣고 최선을 다하지만, k의 질문은 약간 핵심을 비켜난 것이 대부분이었다.
“k는 중학교 때 성적이 좋았어요. 충분히 잘할 거예요.”
같은 중학교를 나온 아이들의 평가에 힘입어 k는 학급 일에 최선을 다했다.
문제는 1학기 1차 지필고사를 치른 후였다. k의 성적은 반 평균에서 조금 높은 정도에 머물러 있었다. 한 과목만 그런 게 아니라 거의 모든 과목이 그랬다. 성적이 나온 후에 k의 얼굴은 눈에 띄게 초췌해졌고 조급함이 느껴졌다.
지나치게 풀이 죽은 k를 달래느라 1학기 지필고사는 고등학교에 들어와 모든 애가 다 열심히 하니까 원하는 성적을 얻기가 어려울 수 있다고 말해주었다. 그러면서 어떻게 공부하고 있냐고 물어보니 학원에 다니면서 중학교 때보다 더 열심히 밤잠 안 자고 공부했다는 거다. 이번에 문제가 어려웠고 경향 파악을 못 해서 그러니 다음 시험에는 꼭 만회하겠노라고 다짐하고 돌아가는 모습을 보며 우리나라 고등학교 학생들의 고달픈 현실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시간을 더 투자했으니 성적이 잘 나오리라고 믿었던 k의 상태는 2차 지필고사가 끝난 후엔 경악으로 변했다. 이전보다 성적이 더 안 나왔다. 공부를 못하는 반장은 학급에서 영향력이 줄어든다. k의 자신감은 바닥을 쳤고 눈동자는 점차 초점을 잃어갔다. 우수한 학생에서 보통 이하의 학생으로 강등된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보였다.
학교에 있다 보면 k와 같은 아이들을 많이 만난다. 냉정히 얘기하면 성적 인플레가 심해 정확한 자기 객관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기대치가 높은 아이들이 이런 경향을 보인다. 보통의 성적인데 과도하게 높은 평가를 받아 그것이 이어지면 정확한 자기 응시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나는 1학년 때 k를 가르쳤지만 고 3이 되어 이전보다 훨씬 피폐해진 모습으로 복도를 지나가는 k를 보고 놀라 마음이 무너졌다. 거듭된 시험 결과에 망가졌을 그의 마음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사이 머리를 길러 얼굴을 반쯤 가린 어두운 그의 얼굴을 보니 그간의 학교생활이 어땠을지 짐작이 간다.
중학교 때 좋은 성적을 낸 학생들은 고등학교에 와서도 당연히 그것이 이어질 거로 생각한다. 그러나 고등학교는 중학교와 다르다. 철저하게 자기 주도적인 학습이 기반이 되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과정이 많아진 상태에서 주입식으로 시간만 많이 투자한다고 성적이 오르지 않는다. 주요 개념을 다시 정리하고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시간을 늘려야 하는데 과거의 영화가 발목을 잡아 그것도 쉽지 않다.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아이들은 무너진다. 처음엔 반신반의하다가 자기 능력 자체에 회의를 갖고 무너져 회복하기 힘든 순간에 이르기도 한다. 한 명의 일등을 만들기 위해 나머지 이등, 삼등은 거기에 못 미치는 들러리가 아닌가. 일등에 도달하기 위해 아이들의 능력치나 상황과 관계없이 몰아가는 입시 위주 교육에서 때로 슬픔보다 분노가 생긴다. 자신의 고유한 특성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등수가 그 아이를 대변하는 현실에서 k와 같은 아이들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고유한 우수함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설령 현재 사회가 추구하는 가치와 맞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소중한 부분이다. 현재 확연히 빛나지 않더라도 자신이 가진 아름다움을 보존하고 발전시켜 현재보다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가면 된다. 그것이 성적과 상관없더라도 말이다. 별처럼 거대한 빛남이 없어도 고유한 반짝임을 가진 존재가 소중한 법이다. 별이 아니면 어떤가. 개똥벌레에 불과한들 어떻단 말인가. 작지만 스스로 반짝이는 존재는 그 빛을 오래 간직할 수 있다.
나는 내가 빛나는 별인 줄 알았어요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었죠
몰랐어요 난 내가 벌레라는 것을
그래도 괜찮아 난 눈부시니까
하늘에서 떨어진 별인 줄 알았어요
소원을 들어주는 작은 별
몰랐어요 난 내가 개똥벌레라는 것을
그래도 괜찮아 나는 빛날 테니까
요즘 다시 중식이 밴드의 노래를 듣고 있다. <나는 반딧불>이란 노래를 듣다가 k가 떠올랐고 자신이 빛나는 별인 줄 알고 살아온 사람들의 좌절이 생각났다. 나도 그들 중의 하나이기에 노래를 들으며 눈물이 났다.
‘그래도 괜찮다’라는 위로에 기대 k가 힘을 냈으면 좋겠다.
이 시대에 좌절하고 절망하는 모든 이들도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