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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eCi Jun 17. 2020

20kg 캐리어 두 개에 취향 구겨넣기

낯선 외국에서 일하며 살며

3월 초부터 코로나19 때문에 아파트에 있는 공용 헬스장을 이용하지 못하게 되었다. 밖에 돌아다닐 곳도, 돌아다니기도 여의치 않은 상황이라 '홈트' 라도 해야겠다 싶었지만 내 요가매트는 다른 이삿짐들과 함께 한국에서 배를 타고 오는 중이었고 한 달 정도 뒤에나 도착할 예정이었다. 한 달을 기다리며 매트 없이 운동을 할까 하다가, 마음을 바꿔 쇼핑몰에 갔다. 여러 요가매트 중에 짙은 파란색의 두께가 얇고 단단한 요가매트가 눈에 들어왔다. 가장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그건, 그중 가장 비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걸 골랐다.

이건 나에게 아주 큰 변화였다. 나는 지난 내 삶에서 가장 내 마음에 드는 걸 기준으로 물건을 고르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무언가를 사는 것 자체를 굉장히 많이 망설이고 고민했기 때문이다.




이사가 잦았던 어린 시절, 방학 동안 부산 외갓집에 간 사이에 서울의 집이 이사를 갈 때가 많았고, 그 과정에서 종종 내가 아끼던 물건이 한두 개씩 없어지곤 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정말 아끼는 것은 바리바리 싸들고 외갓집에 가는 열정을 보였다. 대학에 입학한 이후에는 장기로 짐을 보관할 만한 곳도 없이 여기저기 잠시 살거나 외국에 체류하는 삶을 살게 되면서, 거주지를 한 번씩 옮길 때마다 내 소지품은 그야말로 '짐' 취급을 받으며 매번 '사는 데 정말 필요한 것인가'를 기준으로 분류되어 버려지거나 다른 곳으로 보내졌다.


가장 먼저 줄이게 된 건, 책이었다. 나는 책을 참 좋아한다. 책을 읽는 것도 좋아하고, 책 자체도 좋아한다. 사고 싶은 책이 생기면 신중하게 고민해보고 꼭 사고 싶다는 결심이 서면 새 책을 사서 이름을 적어놨었다. 전공서적도 물려받거나 제본(지적재산권 침해에 유의하세요!)을 뜨기보다는 대부분 구입을 했다. 하지만 책은 무게가 많이 나가서 들고 다니기가 너무 힘들다. 그래서 거주지를 옮길 때마다 모아놓은 책들을 좍 늘어놓고, 한참 망설이고 망설이며 덜 좋아했던 책이나 덜 읽을 것 같은 책들을 추려서 헌책방에 가져다 팔거나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했다. 매번 그렇게 책을 늘어놓고 골라내고 골라내어, 이제 내 손에 남아있는 종이책은 몇 권 없다.

옷도 팍팍 줄였다. 옷은 쉬웠다. 애초에 옷에 크게 관심이 없어 많지도 않았고, 매번 입는 것만 입는 편이라 자주 안 입는 옷은 동생에게(내 동생은 옷을 좋아하고, 옷이 많기도 하고, 잘 버리지도 않는다), 친구들에게, 아름다운가게에 돌아가거나 혹은 헌옷수거함으로 들어갔다. 신발도 한두 켤레만 가지고 신다가 떨어지면 그제야 버리고 새로 샀다.


문제의 추억이 서린 물건들은, 버리기 힘들지만 그래도 꽤 많이 버렸다. 내가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도 좋아하는 모 그룹의 굿즈(그 많던 잡지 모음, 브로마이드, 직찍, 명찰, 사설 팬클럽 명함들, 신문스크랩, 직접 만든 필통, 쇼핑백, 라디오 녹음테이프, DNA 향수, 노트 등)들은 애진작에 친구 집에 맡겨놨다가 그 친구와 연락이 끊기면서 의도치 않게 사라진 지 오래고, 그 외에도 어렸을 때부터 꾸준히 써온 일기장, 오랫동안 즐겁게 활동했던 모임의 단체티, 아이들에게 받은 종이접기 선물, 여행지에서의 추억이 담긴 뭐뭐..... 보관하기 너무 어렵거나 부피가 큰 물건은 사진을 찍어놓고 어렵게 어렵게 버렸다. 그래도 상자 하나 정도 분량이 아직 남아있긴 하다.


가구나 가전제품, 주방용품, 침구 같은 건 아예 있지도 않았다.


이렇게 짐을 줄이다 보니, 내 짐은 여행 캐리어 한두 개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추가 수화물도 안나온다. 간편해라. 사실, 저 정도면 어딜 가도 사는데 별 지장은 없다. 기본적으로 생활에 필요한 것이 구비된 집을 구하고, 생필품과 소모품은 현지에서 사면되니까.




대신, 취향이 없어졌다.


어딜 가나 여긴 어차피 임시로 살 곳이고 내 집이 아니라는 생각이 늘 있었다. 아무리 길어야 2년 뒤면 떠날 곳이니까. 금액 맞고 안전하고 대충 조건 맞으면 그걸로 Okay. 그 집에 머물렀던 누군가의, 혹은 집주인의, 이리저리 섞인, 그리 고려되지 않은 취향에 맞춰 살았다. 마음에 드는 물건을 봤다 쳐도, 사면 떠날 때 다 짐이라는 생각이 늘 마음 한켠에 있었다. 꼭 필요한 게 아니면 사지도 않을뿐더러, 어쩔 수 없이 필요에 의해 무언가를 사야 하면 가장 싼 거, 혹은 가장 가성비 좋은 걸 사게 된다. 어차피 쓰다가 두고 갈 거니까. 아무리 마음에 들어도 부피가 나가는 선물을 받으면 기쁨보다 부담감을 먼저 느꼈다. 이걸 또 어떻게 들고 다니나 싶어서. 내 인생은 20KG 여행용 캐리어 두 개에 맞춰져 있었고 거기에 맞추다 보면 모든 게 다 짐이었다. 소중한 게 추가로 생기면, 기존의 소중했던 무언가를 그만큼 빼서 버려야 했다. 그래서 소중한 것이 늘어나는 게 늘, 부담스러웠다.

어느 순간, 지치기 시작했다. 어디를 가더라도 떠날 것부터 늘 염두에 두게 되고, 그 틀 안에 맞춰서 내 삶을 계획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내 짐뿐만 아니라 나 자신을 간소화하는 것이 몸에 베여갔다. 이게 내 삶이고 여기에서의 삶도 나의 삶인데, 은연중에 나는 내 삶을 '임시'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매 순간이 모여 내 전체의 삶을 만들어 간다는 걸 잊었고,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잊게 되는 순간이 자주 찾아오며 혼란이 늘어갔다. 여기저기 옮겨다니는대로 나도 이리저리 휘둘리고 있었다.


잠비아에서 다른 두 명의 친구와 함께 살 때였다. 한 명은 잠비아에 4년째 살고 있는 친구였고 집도 그 친구가 빌려서 가구도 사고 살림을 차려 놓았다. 다른 한 명은 6개월 정도 인턴으로 일하러 온 친구였다. 그 친구는 6개월만 살다 갈거라 그런지 짐이 많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2년 살 나만큼은 짐이 있었다. 그 친구가 잠비아에 4개월쯤 살던 어느 날(그러니까 이제 갈 날이 두 달쯤 남은 어느 날), 집에 커다란 전신거울을 사들고 왔다. 요즘 살이 좀 찐 것 같아 자기 전신을 보고 싶다면서. 나는, 좀 의아했다. 물론 좀 불편할 수는 있지만 두 달 정도는 욕실의 큰 거울로 대충 볼 수도 있을텐데, 고작 두 달 보겠다고 전신거울을 사들고 오다니. 그 친구는 그런 방식으로 사는 친구였다. 3개월을 살든 6개월을 살든, 지금 자기가 사는 곳이 자기 집이고,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 자신의 의지와 취향을 반영하려고 했다.


여기저기 옮겨다녀도, 사람들이 자기 취향을 얼마든지 반영하면서 살고 있었다. 1년 계약으로 잠비아에 파견 온, 키가 유달리 큰 한 친구는 자기가 좋아하는 2층 집을 골라서 자신의 키에 맞는 식탁과 의자를 주문제작했다. 내 애인은 자기가 좋아하는 디자인의 차를 현지에서 구하지 못하자 외국에서 수입해서 들여오기까지 했다(관세가 100% 붙는지 몰랐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어디에 있더라도, 어떤 상황이더라도, 자신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이번에 파키스탄에 올 때, 나는 새롭게 생각했다. 1년을 살더라도 여기가 내 집인 거라고. 집을 꾸미고 싶은 만큼, 내 취향대로 꾸미자고. 어차피 계속 떠돌아다니며 여기저기에서 살고 있는데 그 모든 시간을 '임시'로 취급하면, 남의 취향에 의해 꾸며진, 혹은 주어진 것에 갇혀, 내 것이 아닌 것에만 둘러싸여서 평생 나 따위는 잊고 살게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해외이사를 할 수 있는 조건이 된 덕분이기도 하지만) 내 집에 놓고 싶은 물건을 다 챙겼다. 책도 잔뜩 챙기고, 벽에 붙여놓으려고 사진도 잔뜩 뽑아왔고, 아끼는 그림도 가져왔다. 공기청정기도 사고 수건과 이불도 새 걸로 샀다. 잠비아에 갈 때는 헌 이불에, 동생 집에 있던 수건 중 가장 낡은 수건들을 골라서 가져왔었다, 쓰고 버리고 오려고(실제로 쓰고 버리고 왔다).

전신거울을 샀던 그 친구는 잠비아를 떠날 때 그 거울을 나에게 주고 갔다. 확실히 전신거울이 있으니 내 몸을 다 비춰볼 수 있어서 좋았다. 잠비아에 살던 기간 동안 그 거울을 참 잘 썼고, 떠날 때 필요하다는 사람에게 주고 왔다. 지금 파키스탄의 내 집에는 다른 전신거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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