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외국에서 일하며 살며
'개발도상국'이라는 용어는 국제 협약마다 기준도 다르고, 개도국을 정의하는 지표들도 여러가지라 너무 포괄적이지만, 이 글에서는 단순하게 경제적 지표가 우리나라보다 낮은 나라, 정도로 사용해 보겠다.
'나라마다 다르다, 쓰는 만큼 다르다'는 걸 기본 전제로, 개도국 전반적으로 보면 물가가 싸다고 얘기할 수 있다. 전반적인 소득과 지출 수준에 비례해서 물가가 정해지니까. 그렇다면 이 나라의 평균보다 소득이 높은 외국인 입장에서는 물가가 쌀까? 외국인으로 살면 '외국인 물가'라는 게 적용되는 것 같다. 바가지와는 다른, '외국인 가격'이 있기도 하고, 삶의 방식 차이도 있고, 품질에 대한 기준도 다르고, 실제로 물건값이 비싼 경우도 있다. 여행으로 갔을 때 느끼는 관광지 물가와도 또 다르다.
관광지에는 '관광지 물가'가 있어서, 같은 나라에서도 관광지인 곳과 아닌 곳의 물가가 차이가 난다. 혹은 현지인과 외지인/외국인을 구분해, 물가를 모르는 외지인/외국인한테 바가지를 씌우기도 하고. 하지만 관광지가 아닌 곳에 살 때는, 일상 생활에서 바가지를 쓸 일이 많지 않았다. 주로 이미 가격표가 다 붙어있는 쇼핑몰에 가서 장을 보고, 길거리나 시장 등 가격이 적혀있지 않은 곳에서 물건을 살 때도 흥정하다가 비싼 것 같으면 안사면 그만이니까. 택시 탈 때 바가지를 좀 쓰긴 했는데, 우버나 비슷한 앱(파키스탄의 Careem, 잠비아의 Ulendo)이 나오면서는 바가지 쓸 일이 더 줄었다. 하지만 일 하면서 중고차를 산다거나, 대량으로 물건을 구입하는 경우에는 꼭 현지 직원이 견적을 받아 왔다. 외국인이 가면 가격을 높게 부른다고.
'외국인 가격'이라는 것이 공공연히 존재했다. 외국인에게 가격을 높게 부르는 것 외에도, 다른 의미가 있는 듯 했다. 그 실체가 정확히 뭔지는 나도 잘은 모른다. 내가 이미 외국인이라 아무 현지인도 나에게 그 사실을 정확히 설명해 주지 않았다. 잠비아나 말라위 등에서는 이를 'Muzungu (현지어로 외국인, 특히 피부색이 하얀 외국인을 부르는 단어) Price'라고 불렀는데,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내가 시장에 가서 마음에 드는 물건을 사서 다음날 사무실에 들고 가면, 현지인 직원들이 얼마 주고 샀는지 물어본다. 내가 가격을 말하면, 다들 피식 웃으면서, "Muzungu Price." 하고 끝이다. 추가 설명은 해주지 않는다. 물어보면 다들 뭐 그냥 제값에 잘 샀다고는 하는데, 아무튼 내가 산 가격은 Muzungu Price다.
아마 이 경우의 'Muzungu Price'는 '외국인은 저런 물건을 사는구나, 저 가격을 주고 사는구나', 하는 의미였던 것 같다. 현지인이 흔히 사지 않는 걸 외국인은 산다, 는 차이를 보여주는 느낌이랄까. 이 느낌은 일상생활에 깊이 스며들어 있었다. 외국인을 주 고객층으로 겨냥한 시장이 형성되어 있고, 가격도 그에 맞게 매겨져 있었다. 상대적으로 가격이 높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곳을 잠비아에서는 농담처럼 'Muzungu Place'라고 부르기도 했다. 루사카의 외국인을 겨냥한 식당은 가격이 서울의 맛집들과 크게 차이가 안 나서, 한 끼에 만원이 훌쩍 넘는 곳도 많다. 카페도 한국 프랜차이즈 카페 수준의 금액이고. 외식을 하면 주로 이런 식당을 가는데, 현지인이 반 외국인이 반이다. 외식하러 가면 아는 사람들 다 만나고. 외국인들 가는 곳이 거기서 거기다.
'Muzungu'라는 단어가 외국인에게 익숙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현지인이 주로 이용하는 미니버스라든지, 시장은 외국인이 잘 가지 않는 경우가 많다. 현지시장은 이용하는 외국인이 별로 없어 튀기도 하고, 현지어를 못하면 말이 안 통하기도 하고, 가격도 흥정해야 하고, 바가지를 쓸 일도 많고, 소매치기 등의 위험도 높고. 외국인 여자에게 집적대는 남자들은 너무 많고. 외국인에게는 익숙하지 않기도 하고 불편하고 비효율적이다. 같은 물건이라면 현지시장이 조금 더 싸겠지만, 일부러 구경가는 경우가 아니면 장을 볼 때 아무래도 Muzungu 스러운 쇼핑몰을 더 많이 가게 된다. 현지시장 방식은 익숙하지 않아도 쇼핑몰은 이미 아는 방식이라 편리하니까.
시내 대중교통으로는 택시를 제외하고는 잠비아와 파키스탄 모두 미니버스라고 봉고차처럼 생긴 버스가 있는데, 타려면 탈 수야 있겠지만 운행 노선이 몇 개 없고 버스가 다 찰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등 비효율적이라 가끔은 정말로 걷는 게 더 빠를 때도 있다. 길을 잘 모르면 어디서 내려야 하는지, 어디서 갈아타야 하는지 알기도 어렵고. 혼자 타기 겁날 때도 있다. 현지인들도 다 타는 미니버스를 외국인이라고 못 탈 이유는 없지만, Muzungu는 쉽게 탈 엄두를 내지는 못한다. 주로 택시를 타고, 1년 이상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차를 사거나 렌트를 한다.
같은 물건이나 같은 품질이라도 개도국에서 물건이 더욱 비싼 경우도 많다. 질이 낮은 쪽으로 선택의 폭은 더 넓지만, 반대쪽의 폭은 좁다. 어느 정도의 품질을 맞추려고 한다면 개도국의 물가는 절대 싸지 않다. 그 나라에서 생산되지 않는 물품은 희귀해서 가격이 비싸고, 수입한다고 하더라도 도로 등 인프라가 부족해 운송비가 더 비싸다. 게다가 잠비아 같이 내륙에 위치한 국가라면, 해안국가를 통해 수입을 하면 몇 개 국경을 지나오기 때문에 수입하는 데 드는 금액이 비싸 결과적으로 물건값이 더욱 비싸진다.
특히 공산품은 상대적으로 질은 낮고 가격은 오히려 비싸고, 내가 원하는 품질의 물건은 돈을 얼마를 주고 산다고 해도 없을 때도 있다. 휴지를 예로 들어 보면, 우리나라처럼 '무표백 먼지 없는 3겹 친환경 휴지'는 그 나라에 존재하지 않는다. 있는 휴지들 중에서 가장 좋은 거(a.k.a. 가장 비싼 거)는, 우리나라의 무표백 먼지 없는 3겹 친환경 휴지와 비슷한 가격이거나 혹은 더 비싸다. 질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싼 휴지보다 더 안 좋을 수도 있고.
야채나 생선, 고기 등의 식료품도,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그 나라에서 자라는 것들은 가격이 저렴하고, 수입하는 것들은 비싸다. 잠비아처럼 바다가 없는 나라는 해산물과 바다생선을 찾기도 힘들고 냉동된 게 있다고 해도 우리나라보다 비싼 데다가, 그나마 불안정한 전기 탓에 언제 녹았다가 다시 얼었는지 모를 일이라 품질을 보장하기가 쉽지 않다. 농산품도 다양하지가 않고, 대부분 수입이라 싸지 않았다. 대신 싼 건 진짜 싸다. 바나나나 옥수수처럼 잠비아에서 많이 나는 것들은 가격이 우리나라의 절반 이하였다. 반면 파키스탄 같은 경우는 바다도 있고, 농작물도 다양한 편이다. 콩이나 쌀 등도 싼 편이고, 제철에는 체리도 정말 싸다.
인프라가 부족해 전기나 물, 인터넷 등이 비싼 경우도 많다. 더해서 정전이나 단수, 통신장애 등은 잦고. 잠비아는 전기, 물, 인터넷 모두 한국보다 비쌌다. 특히 인터넷은 우리나라처럼 무제한 요금제보다는 용량별 요금제가 일반적인데, 우리나라에 비해 두세배 비쌌다. 2019년에 100GB 요금제가 한 달에 한화로 약 10만 원 정도 했던 것 같다. 파키스탄은 전기세가 조금 비싸고, 물세는 낸 적이 없고(가정집에서의 수도세 체계가 아직 제대로 확립되지 않은 것 같다), 다행히 인터넷은 느리긴 해도 무제한 요금제도 있고 가격도 한국과 비슷한 수준이다. 심지어 모바일 요금제는 한국보다 싸다, 무제한 요금제는 없지만.
병원비는, 한국 의료보험 체계에 익숙한 나로서는 선진국이고 개도국이고 외국인으로서 병원 가는 게 정말 비싸다고 느껴진다. 정말 비싸다. 그리고 비싼 곳을 선택할 수 밖에 없다. 개도국에서는, 아프면 무조건 그 나라에서 최고 좋은, 'International' 붙은 병원에 가야 한다. 안전상 병원의 질은 양보할 수가 없다. 의사 한 5분 보고 약 받고 하면 10만 원은 그냥 나온다. 입원이라도 하게 되면 하룻밤에 100만 원도 넘게 나올 수도 있다. 보험은 정말 필수다. 꼭 들어야 한다.
집 같은 경우는 오히려 너무 크고 좋은 집만 있거나 아니면 너무 열악해서 격차가 너무 크다. 크고 좋은 집은 크기에 비하면 월세가 비싸다고 할 수는 없지만, 혼자 그 큰 집의 월세를 감당하기엔 벅차다. 전세 개념이 있는 것도 아니고. 너무 열악한 곳은 살기 힘들고. 그래서 혼자 사는 사람들은 큰 집을 같이 빌려 방을 나눠 쓰거나 층을 나눠 쓰기도 하고, 큰 집에 딸린 작은 코티지에 세들어 살기도 한다. 물론 큰 집에 혼자 사는 사람도 있다.
어느 나라에 가든지 현지에 적응해 가면서 어느 정도 현지의 방식과 내가 살던 방식을 섞어서 살게 되는데, 삶은 다면적 스펙트럼이라 어느 방면에서는 쉽게 적응하기도 하고, 어떤 방면으로는 적응하지 못해서 Muzungu에 머물러 있기도 했다. 다만 적어도 내가 사는 곳의 사람들이 다들 어떻게 먹고사는지 정도는 알아가며 살려고 노력하려고 한다, 어쩔 수 없는 외국인이지만 너무 Muzungu 스럽지 않게 살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