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지 못해 고통받는 양극단의 아이들
드라마 <SKY캐슬>이 화제다. 자녀들을 성공시키기 위해 물불 안 가리는 부잣집 이야기는 욕하면서도 보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드라마에서는 어른들의 세계 못지않게 아이들의 세계가 흥미진진하게 그려지는데 놀랍게도 아이들은 절대 놀지 않는다. 아니 유일하게 노는 장면이 있었는데 편의점에서 물건을 훔치는 것이었다. 물건 훔치는 것이 놀이일 수 있는지는 드라마 속 배우의 대사를 통해 알 수 있다. "우리 예빈인 도둑질을 한 게 아니라 스트레스를 푼 거야. 내 딸한테 그건 게임이고 놀이었을 뿐이야."
놀이는 아예 사라진 드라마 속 아이들의 모습이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현실을 반영한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시청자 게시판에 아이들이 노는 장면이 없어 현실감이 떨어진다는 의견이 단 한 건도 없는 것으로 보아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는 놀지 못하고 공부에만 매달리는 부잣집 아이가 더 그럴듯해 보인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옛날처럼 4당 5락(4시간 자면 합격, 5시간 자면 불합격)이라고 직접적으로 이야기 하지는 않지만, 초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공부습관을 들이기 위해 놀이시간부터 줄이는 부모들이 여전히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일반적인 아이들은 얼마나 놀고 있을까? 복지부의 조사에 따르면 아이들의 절반 정도는 방과 후에 친구들과 놀고 싶어 했지만 실제 노는 아이들은 6%에 불과했다고 한다. 다른 연구에서도 자유롭게 휴식 및 놀이 시간을 전혀 갖지 못하는 아동이 4명 중 1명에 달했다. 5살 아이의 하루 놀이시간을 조사했는데 1시간을 겨우 넘었고, 바깥놀이 시간은 일주일에 226분밖에 되지 않았다. 하루 30분 수준인 것이다.
학구열이 심한 우리나라에서만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아이들에게 놀이가 사라지고 있는 것은 전 세계적 현상이다. 미국과 중국 등 8개국 3,723명의 아이들을 조사한 결과 놀이를 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없다고 응답한 아이들은 17%에 달했다. 또 다른 연구에서는 10명 중 1명의 아이들은 한 주에 놀이시간이 2시간이 안 된다고 응답했다. 삶에서 아예 놀이가 없다고 말한 아이들도 8%에 달했다.
놀지 못하는 아이들이 많다는 데이터를 보면 얼마나 놀아야 충분한 것일까 의문이 든다. 아이들은 놀아도 놀아도 부족하다 말한다. 부모 입장에서 하루 종일 놀게 내버려 둘 수도 없는 노릇이다. 연령에 따라 학습과 균형 있는 배분이 중요한데 그러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가 충분한 것인지 궁금할 수밖에 없다.
미국이나 영국, 캐나다의 가이드라인을 살펴보면 공통적으로 만 6-17세 아이들은 하루에 적어도 60분 이상 신체활동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일주일에 3번 정도는 격렬한 유산소 신체활동을 포함해야 한다. ‘격렬하다’는 운동 후 숨이 차서 말을 하기 어려운 정도의 격렬함이다. 이보다 더 어린아이들은 적어도 하루에 3시간 이상 신체활동을 해야 한다. 신체활동의 종류는 다양하지만 친구들과 함께 바깥에서 뛰어노는 것을 권장한다. 대신 앉아서 공부를 하거나 스크린을 보는 시간, 유모차에 탄 채로 행동이 억제되는 시간은 제한해야 한다고 말한다.
안타깝게도 우리나라 아이들의 신체활동 정도는 가이드라인에 훨씬 못 미친다. 청소년들이 하루 1시간 주 5일 이상 신체활동을 실천하는 비율이 14%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과 비교하면 3분의 1 수준이다. 고등학생은 11% 정도로 고학년으로 갈수록 더 낮아진다. 남녀의 격차는 더욱 컸다. 여학생은 남학생의 3분의 1 수준이고, 고3 여학생의 경우 단 5%에 그쳐 모든 조사 대상자들 가운데 가장 낮은 신체활동 실천율을 보였다.
여기서 우리가 더 살펴봐야 할 부분이 있다. 바로 대한민국 아이들 사이에 존재하는 양극단의 아이들이다. 한 쪽은 SKY 캐슬 아이들이다. 넉넉한 가정 형편에 부모의 과보호를 받으며 일찌감치 생활기록부에 잘 기록되기 위한 생기부 인생을 산다. 이런 아이들은 놀이시간이 극도로 짧고 사교육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게임이나 미디어 이용시간도 많지 않다. 소위 관리받는 아이들이다.
반면에 내가 오랫동안 알고 지낸 윤세(가명)는 하루 종일 놀기만 한다. 윤세의 부모님은 두 분 다 장애가 있고, 가정 형편이 넉넉치 않아 나라의 도움을 받고 있다. 위로 형이 두 명, 아래로 남동생이 한 명 있는 윤세는 학교를 마치면 공부방에 들려 잠깐 숙제를 하고, 이내 집에 와서 컴퓨터 게임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형이 와서 컴퓨터를 뺏으면 핸드폰으로 넘어가고 핸드폰을 뺏으면 TV를 보는 식이다. 놀이라는 자유가 방종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윤세도 옛날에는 밖에서 좀 노는 편이었는데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니 동네에서 노는 애는 자기 밖에 없고, 돌아다녀봐야 갈 곳도 없어 그냥 집에 있는 편이라고 했다. 난 윤세를 만날 때 마다 이 아이에게 놀 권리는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고 놀이가 중요하다는 외침이 어떤 울림으로 들릴지 항상 아득하기만 했다.
실제로 가구소득이 가장 낮은 그룹은 가장 높은 그룹보다 69분 놀이 시간이 더 길고, 사교육 이용은 하지 않는다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 반면 미디어 이용시간은 78분 더 긴 것으로 나타났다. 이 그룹의 대부분은 놀이장소를 집이라고 응답했고, 놀이 대상도 혼자 노는 경우가 다른 모든 그룹에 비해 약 2배가량 높았다. 가구소득이 낮을수록 놀이시간은 늘어나지만 놀이의 질은 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양극단의 아이들을 빼놓고 평균으로 파악한 놀이 상황만으로 단순하게 접근한다면 함정에 빠질 수 있다. 바로 평균의 함정말이다.
놀 시간 조차 없이 하루종일 누군가 짜놓은 시간표대로 바쁘게 움직여야 하는 아이. 챙겨주는 사람이 없어 집에서 혼자 게임만 하는 아이. 이런 양극단의 아이들 모두 진정한 놀이의 기쁨이 회복되어야 할 우리의 아이들이다. 자칫 평균값만 놓고 사태가 그다지 심각하지 않다고 말하거나, 단순하게 놀이시간만 늘리면 되겠다는 식으로 접근하면 그야말로 평균의 함정에 빠져 허우적거릴 수도 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대한민국의 아이들은 대체로 놀이 부족으로 크든 작든 고통을 받고 있다. 그 와중에 양극단의 아이들은 더 큰 고통을 받고 있다. 현재 아이들의 놀이실태와 가정 형편, 지역사회 자원 등 제반 요인을 면밀히 검토하고 양극단을 포함해 아이들을 여러 그룹으로 묶어 이에 따른 개별적인 솔루션을 제공해야 하지 않을까? 예를 들어, 과도한 사교육으로 놀이시간이 부족한 아이들의 경우 학교 수업 안에서 최대한의 놀이시간을 확보해주어야 한다. 또한 방임 상황에 놓인 아이들은 지역 사회를 중심으로 방과후에 친구들과 함께 모여 놀기도 하고 배우기도 하는 작당의 공간을 제공해주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놀이에서만큼은 단 한 명의 아이도 소외되거나 뒤처지지 않도록 세심한 접근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