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청소년들의 사라진 신체활동 이야기
중학교 시절 하루는 남자 애들끼리 모여 다시 태어나면 남자와 여자 중에 무엇으로 태어나고 싶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부분 애들은 여자로 태어나고 싶다며 음란한 마음을 담아 이야기했다. 한 친구의 대답은 달랐다. “난 남자로 태어날 거야. 여자로 태어나면 재미있는 게 별로 없는 거 같아. 점심시간에 축구도 안 하고, 방과 후에 농구도 안 하고, 떼로 몰려다니며 자전거도 안 타고 놀지를 않아. 여자로 태어나면 재미없지 않을까?”
나는 당시 그 친구의 이야기에 상당히 동의하는 편이었다. 운동장은 축구하는 남자애들 차지였고, 방과 후에 자주 들리던 동네 농구장도 그랬다. 버스 타고 가야 했던 체육센터는 일부 중년 여성들이 에어로빅도 하고 배드민턴도 쳤지만 막상 또래 여자애들은 찾을 수 없었다. 당구장에도, 탁구장에도, 한강 자전거 길에도 또래는 남자가 대부분이었다.
초등학교 때만 해도 동네 여자애들이랑 함께 뛰어놀고 자전거를 타고 먼 동네까지 가기도 했다. 육상을 준비하던 여자애와는 방과 후에 누가 더 빠른 지를 걸고(내가 매번 졌다) 달리기 시합을 하며 놀기도 했다. 고삐 풀린 망아지 마냥 동네를 함께 휘젓고 다니던 여자애들이 고학년이 되고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하나 둘 사라졌다.
세월이 흘러 강산이 두 번 바뀐 지금은 어떨까? 요가나 발레, 댄스 스포츠, 필라테스 등 여성을 주 대상으로 하는 운동 클래스도 많아졌고, 마라톤이나 등산, 복싱처럼 과거에 비해 여성들에게 문이 활짝 열린 종목도 많아졌다. 겉으로 보기에 여자 청소년을 위한 신체 활동 기회는 분명 늘어났다.
하지만 데이터는 여전히 여자들에게 중, 고등학교 시기가 신체활동 불모지임을 밝히고 있다. 일주일에 30분도 체육활동을 하지 않는 10대 여자 청소년의 비율이 거의 절반에 이르고, 그나마 하는 활동은 걷기, 맨손체조, 줄넘기 정도로 제한적이다. 그러다 보니 강도가 높은 신체 활동량에 있어서는 여자 청소년이 남자 청소년에 비해 뚜렷하게 낮은 것으로 나타난다. 하루 신체활동 권장량을 충족하는 여학생은 4명 중 1명꼴로 미국 45%, 영국 62%인 것에 비교하면 현저하게 낮은 수준이다.
이유가 무엇일까? 난 여자 청소년들의 목소리가 궁금했다. 다행히 고등학교 여학생 670명의 목소리를 들은 연구가 있었다. 이 연구에서 많은 여자 청소년들은 ‘모두가 나를 쳐다본다’는 시선의 압박이 신체활동을 가로막는 요인이라고 말하고 있다.
남자애들이 공부 안 하고 운동 잘하면 인기 있는데, 여자애들이 그러면 되게 웃기게 보거든요. 꼴통이라고.
‘다 큰 여자애가 무슨 운동이냐’는 시선은 우리 사회에서 여전하다. 체육을 직업으로 선택하는 아이가 아니라면 일상적으로 하는 격한 운동, 특히 남자아이들의 운동이라고 불리는 것은 여자 청소년에게 권장되지 않는다. ‘여성스러운’ 운동이나 다이어트를 위한 운동, 몸매를 가꾸기 위한 운동, 공부할 체력을 유지할 수 있는 운동 정도가 권장된다.
같은 반 남자아이가 점심마다 농구를 하러 가기에 뭐 하냐고 했더니 학교 대회를 나가려고 연습한데요. 체육 선생님한테 가서 여자도 나가자고 했더니 여자는 없다고 그러더라고요. 줄넘기하고 육상이 있다고 했나?
놀 권리 활동을 하며 만난 축구를 무척 좋아하는 여자 청소년도 비슷한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학교 방과 후 활동으로 축구교실을 신청했는데 선생님이 요가반으로 옮겼다고 했다. 왜냐고 물었더니 신청한 여자가 너밖에 없어 다른 활동이 더 나을 거 같아서 그랬다고 한다. 선생님 입장에서는 그 청소년이 혼자서 불편할 수 있고, 담당 선생님이 활동 진행이 어려울 수 있으니 더 나은 선택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1972년 미국은 학교 내 성별에 따른 차별을 없애기 위한 법을 제정했다. 이에 따라 남자팀이 있는 학교는 당연히 여자팀도 운영해야 했고, 대학이 남자 선수 10명을 선발한다면 여자 선수도 10명을 선발해야 했다. 종목, 장비, 훈련시간, 코칭, 시설 등 모든 항목에서 남녀는 동일한 대우를 받아야 했다. 법을 준수하지 않는 학교에 대해서는 정부 보조금이 제한됐다. 법 제정 이후 미국 여학생들의 스포츠 참여율과 다양성은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우리 사회는 아직 남자는 운동 여자는 수다라는 인식이 여전하다. 남자들이 하는 운동과 여자들이 하는 운동으로 나누어진 공식은 학교 현장에서 지금도 어김없이 되풀이되고 있다.
여자애들인데 당연히 중요할 수밖에 없어요. 특히 살 타는 거엔 무지하게 민감하죠. 선크림 발라도 타니까, 아예 활동을 안 하거나 아예 그늘에서 하는 게 최선이죠
여자 청소년들이 신체활동을 포기하는 이유 중 하나는 아름다움을 유지해야 한다는 압박 때문이다. 아무래도 몸을 쓰면 땀이 나거나 살이 타기도 하고, 근육이 생기거나 다쳐서 상처가 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여자 청소년에게 요구하는 외적인 아름다움의 기준은 햇볕에 그을린 까무잡잡한 피부, 두터운 종아리 근육, 까진 무르팍, 땀으로 헝클어진 머리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운동 중에도 화장은 뭉개지지 않아야 하고, 땀을 흘린 후에도 향긋해야 하며, 근육은 매끈하게 잡혀야 한다고 말한다.
남자애들은 뭐, 땀나고 와서 그냥 웃통 벗고 화장실에 등목 하기도 하고, 그러는데. 저희들이 그렇게는 못 하잖아요. 생각해보세요. 뛰고 왔는데, 속옷에 땀나고, 그러면 공부 못하죠. 남자애들하고 달라요.
더군다나 요즘은 화장과 타이트한 교복이 일상화되었기 때문에 더욱 신체활동이 위축된다. 안타까운 점은 내세울 가치가 없어 외모가 최고의 자산이 되어버린 텅 빈 우리 사회에서 청소년들도 스스로가 인싸(잘 나가는 친구)가 되기 위해 누가 시키지 않아도 화장을 하고 옷을 줄인다. 안 한다고 찐따(다른 아이들과 잘 어울려 못 노는 아이)라고 할 순 없지만, 무시당하고 싶지 않다고 청소년들은 말한다. 공들인 화장이 땀에 다 지워질 수 없으니 운동을 잘 안 한다. 아동복보다 작은 교복을 입고 무슨 운동인가. 땀 냄새난다는 이야기는 청천벽력이다. 아름다움을 한껏 끌어올린 상태를 유지하려면 격한 운동은 그야말로 멀리해야 할 적에 가깝다.
그런 면에서 나는 편하게 학교를 다녔다. 운동을 마치고 웃통을 벗고 땀을 말리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고, 가끔은 남자답다는 느낌을 받아 스스로 뿌듯하기도 했다. 고등학교 때는 남고여서 더 심했다. 점심시간 축구를 하고 교실 선풍기에 바지를 벗고 몸을 말리는 애들이 수두룩했다. 땀 냄새난다고 창문 열라는 선생님은 있어도 말리는 분은 없었다. 우리 스스로도 자유로웠다. 남자 청소년들이 운동을 열심히 하고 땀 흘리는 모습은 사회적으로 긍정적으로 다뤄졌다.
이상하게 봐요. 운동장에 있는 축구공 가지고 드리블하면 남자 선배들이 보면서 ‘우와’하고 그러거든요. 어색하고, 창피하고 그러더라고요. 매점이나 복도 돌아다니다 남자들이 보고 뭐라 하기도 하고 수군거리면서.
한 연구에 따르면 여자 청소년들은 집 주변이나 학교에서 걷는 것 이외의 운동을 할 때 자신에게 향하는 이상한 시선을 경험한다고 한다. 특히 일상의 공간에서 느껴지는 성적인 시선은 여자 청소년이 적극적인 신체활동을 포기하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제가 어릴 때는 밖에 나가서 뭐든 할 수 있었어요.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신경 안 쓰고 제가 하고 싶은 대로 즐길 수 있었죠. 하지만 지금은 내가 이걸 해도 될까 계속 생각하게 돼요. 모두가 쳐다봐요. 나는 그게 너무 싫어요.(출처)
이런 시선 앞에서 여자 청소년들은 당당해지기보다 수치심을 느껴야 한다고 배웠다. 우리 사회는 여자의 몸을 숨기고 감춰야 할 어떤 것이라고 여전히 말하고 있고, 여자 청소년들을 '순수'와 연결해 더욱 철저히 감출 것을 요구한다. 그렇지 않으면 발랑 까진 아이라고 비난한다. 하지만 한껏 멋을 부리고, 진한 화장에 각선미를 드러낸 청소년 연예인에게는 또 열광한다. 출렁거리면 욕을 먹고 출렁거리면 환호한다. 여자 청소년의 몸에 대한 우리 사회의 지독한 이중성, 이런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말고 거리에서 맘껏 몸을 쓰며 순수하게 뛰어 놀라고 우리는 과연 말할 수 있을까?
친구가 중요하죠. 사실 혼자 나가서 운동하거나 뭐 하기가 되게 그래요. 그래도 여자애들이 함께 하면 힘이 나고 그러죠. 그런데 그런 애들이 없어요. 가끔 혼자 하고 그러죠. 한두 명만 있으면 패스라도 할 수 있는데
여자 청소년들이 신체 활동을 왜 하지 않는지에 대한 물음에 가장 많이 한 응답은 사실 ‘귀찮아’였다. 정말 귀찮은 아이들도 있겠지만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은 사회적 시선과 압력이 지속적으로 작용하여 일종의 무기력 상태가 된 지점에 온 것은 아닐까? 몸으로 노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가 분명 있어도 사회적 분위기나 친구들 분위기나 딱히 하자고 말할 수 없는 그런 상태가 되는 경우 말이다.
정부는 내년 1조 4천억 원의 예산을 투입해 생활 체육을 활성화할 계획이다. 그중 상당한 예산을 생활밀착형 국민체육센터를 짓는데 활용한다. 정부가 5월에 발표한 관련 가이드라인을 보면 여자 청소년의 체육활동 활성화를 위한 고민은 보이지 않는다. 20년 전에도 그랬듯이 그 체육시설에서 여자 청소년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여자 청소년이 뛰기 시작하면 이런저런 이유로 쳐다보는 사회에서는 앞으로 20년이 더 흘러도 여자 청소년들이 친구들과 함께 실컷 맘껏 뛰어노는 것을 상상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 그 많던 여자 아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여자 청소년들의 사라진 신체활동 이야기
https://brunch.co.kr/@jechungman/8
* 메인 사진은 Lululemon의 active girls line 페이지에서 활용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