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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만 Jun 07. 2020

내 삶이 곧 예술이다

오만의 마음치유 일기 6- 글쓰기는 나를 표현하는 한 가지 방법일 뿐


소년은 자꾸 코피를 흘렸다. 이제 끝을 받아들여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소년은 자신 앞에 가까워진 죽음을 인정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의 부모는 그럴 수 없었다. 소년의 부모가 소년을 살리려 노력할수록 소년의 삶은 더 고통스러워졌다.   



"요즘 좀 안 좋아요. 아무것도 안 하고 있거든요. 글을 써야 하는데 글을 못 쓰니까 다른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상담가인 형님이 또다시 내게 해답을 주길 바랐다. 어떻게 하면 내가 꾸준히 글을 쓸 수 있는지, 길을 알려줬으면 했다.


"글을 못 쓰는 게 왜 문제가 되죠?"


되돌아온 형님의 질문은 황당했다. 내가 작가니까. 그건 당연히 문제였다.

글을 못 쓰는 이유는 사실 나도 잘 안다. 사람은 작은 성과라도 주어지지 않으면 일을 계속하기 힘들다. 글을 쓰는 일은, -물론 써야 할 글과 기한이 명확하고, 출판이 보장된 몇몇 유명 작가들을 제외하면- 이 글이 어떤 보상을 가져올지, 세상에 빛을 볼 수 있을지 그런 모든 두려움을 동반한다. 이 글이 또다시 선택받지 못하고, 내게 어떠한 보수도 가져다주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은 글 쓰는 것을 주저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글을 써야 돈을 벌 기회라도 생기기 때문에 글을 쓰는 것은, 팔릴 만한 글을 쓰는 것은 내게 '해야만 하는 것'이 되었다. 번뜩 떠오른 재미난 아이디어를 노트에 적으며 느꼈던 즐거움은 사라지고 글을 쓰지 못하면 난 아무것도 될 수 없다는 공포만이 나를 의자에 앉게 하고, 동시에 의자에 앉는 것을 고통으로 만들었다.

오늘은 의자에 앉지도 못했어. 글 한 쓰지 않았고. 망했어, 오늘은. 오늘은 아무것도 되는 일이 없어. 오늘은 이미 틀렸으니까 그냥 빨리 지나길 바라고 내일은 무조건 글 써야지.

그런 날이 계속될수록 글을 쓰는 일은 더 부담이 되고 의미 없이 흘려보내는 시간이 늘어만 갔다.


"글을 쓰는 건, 가영 씨를 표현하는 한 가지 방법일 뿐 이잖아요? 글이 아니어도 가영 씨를 표현하는 방법은 무궁무진한데 왜 그깟 글 하나 못 쓰는 걸로 소중한 가영 씨의 하루를 날려 보내는 거예요?


나는 가영 씨가 단순히 글 쓰는 사람이 아니라 예술가가 되길 바라요. 가영 씨도 그걸 바라고 있다고 생각하고요. 가영 씨는 환경을 생각해서 분리수거를 아주 철저히 한다고 했죠? 그것도 가영 씨를 표현하는 한 방법인 거잖아요. 나는 가영 씨의 모든 삶이, 모든 행동이 예술이 되길 바라요."


내가 하는 모든 것이 예술이 될 수 있다고? 그 말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 채 상담은 끝났다.

그리고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 세스 고딘의 <린치핀>이라는 책을 읽으며 그 말의 뜻을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이 하는 일에 확신을 갖고 다른 사람이 동의하지 않는다고 해도 개의치 않는다. 예술은 예술가의 일부분이다. 돈을 벌겠다는 생각보다 자신이 하는 일을 중요하게 여기고 그것을 다른 사람과 공유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앞서는 사람들이다.
예술이란 상대방을 변화시키기 위한 선물이다. 매개체는 무엇이든 상관없다. 의도가 핵심이다. 무엇이 되었든 세상을 바꾸기 위한 용기 있는 행동이다. (p167-168)
가장 본능적인 예술은 직접적이다. 사람과 사람, 경쟁자와 경쟁자, 예술가와 관람객 사이의 상호작용에서 일어나는 예술이다. 바로 우리의 모든 행동이다.
모임을 이끌어가는 예술, 학생과 상담하는 예술, 인터뷰하는 예술, 화난 고객을 진정시키는 예술, 자금을 모으는 예술, 벼룩시장에서 카펫을 사는 예술, 디자이너를 다루는 예술이다.
예술이 어떤 사람의 마음을 바꾸는 일이라면, 매일같이 인간관계를 맺는 우리는 모두 예술가다. (p171)
일=돈
'주는 만큼 일한다'는 태도를 공식으로 나타낸 것이다. 나는 이런 태도를 매우 싫어한다. 이런 생각이 우리를 싸구려로 만든다. (...)
단 하루라도 자신이 하는 일의 의미를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오늘 하루를 생산적으로 보내야 하는 이유는 누군가가 나에게 높은 값을 지불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이 나 자신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유일한 기회이기 때문이다. 오늘 하루는 예술을 할 수 있는, 선물을 줄 수 있는, 중요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다. 내가 하는 일이 더 나아지고 나의 예술이 더 중요해질수록 나의 선물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은 많아질 것이다. 내 선물을 누구에게 줄 것인지 훨씬 까다롭게 고를 수 있게 된다. (p175)
열정이란, 선물을 자발적으로 주고 싶어 하는 고집을 의미한다. (p175)



글을 읽다 보니 상담이 끝나갈 때쯤 형님이 해주셨던 이야기가 떠오른다.  



상담사의 조언에 따라 소년은 자신의 마음을 그림으로 그렸다. 그림 속 소년은 코피를 쏟아내고 있었고, 수없이 많은 벌들이 그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다. 상담사는 그 그림을 소년의 부모에게 보여주었다. 소년의 부모는 그제야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연명치료를 포기한다. 얼마 후 소년은 조용히 숨을 거둔다. 요양원이 아닌 소년의 집에서.  소년의 장례가 끝나고 소년의 부모는 상담사를 찾아온다. 아들의 마음을 볼 수 있게 해 줘서, 아들이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고 편히 갈 수 있도록 해줘서 고마웠다고. 집에서 아들과 함께 한 그 며칠이 아들에게도 본인들에게도 참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예술이란 무엇일까. 예술가란 무엇일까. 나는 요양병원에서 일하던 한 상담가의 모습에서 예술가의 얼굴을 보았다. 요양병원에서 일을 한다는 것은 노동 강도에 비해 턱없이 낮은 보수를 받는 일이다. 매일같이 아프고 외로운 사람들을 대면하는 일이다. 그때 만약 그 상담사가 '돈도 제대로 안 주는 거, 받은 만큼만 대충 일하고 말자'라는 마음으로 일을 했다면 한 소년은 남은 인생을 요양원 침대 위에서 고통스럽게 보냈을지 모른다. 소년의 부모는 끝내 아들의 마음도 모른 채 후회의 눈물만 흘렸을지 모른다.

내가 하려는 예술은 무엇인가.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생각해본다.


"저는 가영 씨가 나누는 기쁨을 알길 바라요. 그게 정말 예술이거든요. 가영 씨는 글을 쓰기 위해 자꾸 배우려고만 하지 나누려고 하지 않아요. 가영 씨가 예전에 영화를 만든 것도, 지금 글을 쓰려고 하는 것도 결국 자신을 표현하고 그것을 나누려고 하는 거잖아요. 배우기만 하는 것으로는 절대 채워지지 않아요. 사람들과 공유할 때, 나눌 때 진정한 채워짐을 느낄 수 있을 거예요. "


들을 당시엔 이해하지 못했던 이 말의 의미가 이제야 보이기 시작했다. 영화를 만들고, 글을 썼던 것은 내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기 때문이었다. 내게 재밌던 이야기로 그들을 웃게 하고, 내가 분노했던 것에 대해 같이 분노하고 함께 변화할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영화와 글은 단지 그를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다. 내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고 이 세상에 조금의 변화라도 가져올 수 있다면 그 모든 것은 이미 예술이었다.

나는 내 영화와 내 글이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길 원했던 만큼 내 삶도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것이기를 바란다. 내 삶이 그런 예술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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