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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나율 Nov 01. 2020

검수 못하는 사람

  어릴 적, 잠들기 전에 머리카락을 풀어헤치고 자면 귀신이 내 머리맡에 앉아 머리카락 개수를 센다는 괴담을 들은 적 있다. 동이 트기 전까지 귀신이 머리카락을 다 세면 죽는다는 그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날 오싹하게 했다. 어느새 머리카락을 세며 몰입하고 있는 귀신의 얼굴을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얼굴로 그리고 있으면, 삼삼오오 모여있던 친구들이 물음표를 하나씩 던졌다. 그렇지만…… 만약 그 사람이 대머리라면? 해가 빨리 뜨는 계절엔, 귀신은 자신도 모르게 숫자를 더 빨리 셀까? 머리카락을 한창 세고 있는데 그 사람이 머리를 움직여 아무것도 알 수 없게 된다면? 친구들의 장난기 어린 질문을 들을 때마다 나는 정신이 확 깨는 듯했다. 맞네, 그럼 그 귀신은 어떻게 되는 거지? 어느 순간부터 내 머릿속에 살던 귀신은 점점 희미해지는 듯했다. 그리고 나는 자라서 긴장을 풀어야 할 순간이 닥쳐오면 머리카락 개수를 헷갈려 당황한 귀신의 얼굴을 떠올리곤 했다.


  공장에서는 숫자를 셀 일이 허다하다. 재단된 옷감의 수부터 뒤집은 소매의 개수, 옷의 앞판과 뒤판의 개수, 실과 빈 보빈(bobbin)의 개수, 자른 끈과 고무줄의 개수, 마지막으로 완성된 옷의 수를 세고 나면 또다시 셀 것들이 몰려온다. 하지만 나는 그다지 집중력이 좋지 못해서, 그리고 개수를 세는 나 자신을 믿지 못해서, 한 가지를 세더라도 두 번 세 번, 많게는 다섯 번 이상 세어야 했다.


  “너 또 세고 있니?”


  엄마는 아직도 숫자를 세고 있는 나를 의아하게 쳐다보며 묻는다. 나는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엄마에게 이건 다 개수를 정확하게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게 다 엄마 때문이야. 다시 세어야 하잖아.”


  반은 맞는 말이다. 엄마가 만든 옷의 마지막 검수자는 나이기 때문에 나는 늘 정확하게 숫자를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단순히 개수 파악 말고도 나오시(고쳐야 하는 옷)가 나오면 엄마에게 다시 돌려주는 것도 내 몫이었다. 라벨은 잘 달려있는지 양쪽 소매 주름은 잘 잡혔는지, 지퍼는 가운데에 잘 박혔는지도 꼼꼼하게 살펴야 한다. 아, 엄마는 이런 나의 일을 분명 별일 아니라고 여기는 듯하다! 하지만 날 거치지 않은 완성품은 나올 수 없다. 나는 엄마에게 툴툴대며 세던 옷감을 다시 내려놓고 처음부터 다시 숫자를 셌다. 순간 나는 내 얼굴이 머리카락을 세다가 숫자를 놓쳐버린 귀신의 얼굴과 어딘지 모르게 닮아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글을 쓸 때의 나는 그야말로 숫자를 세는 귀신이 된 것처럼 스산한 사람이 된다. 평소의 나는 느리고 나른한 사람인데, 문장을 쓸 때만큼은 비문이 아닌 문장에 집착하고 적절한 단어를 찾기 위해 어느 때보다 골몰한다. 문장 사이사이를 연결하며 좌절할 때면 나는 나 같이 멍청한 얼굴을 한 이가 세상에 또 있을까 싶다. 그리고 정말 있는 힘껏, 최선을 다해, 가까스로 만들어낸 글을 쭉 읽는 순간이 다가오면 나는 또다시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싶어 지는 것이다. 내가 지금 쓰고 있는 문장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나도 모르겠고, 아무도 모를 거라는 사실이 견딜 수 없다.


  “누가 제 글 좀 읽어주세요!”


  그래서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이렇게 소리 지르고 싶다. 누군가 매 순간 내 뒤를 쫓아다니며 ‘참 잘했어요’ 도장을 찍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첫 책을 출간했을 땐 몇 명의 친구들에게 소고기를 샀다. 이들은 내가 책을 내는 과정에서 정말이지 큰 도움을 준 사람들이다. 아마도 이 친구들은 내 책을 저자인 나와 편집자 다음으로 많이 읽었을 것이다. 학부 시절부터 타인의 글을 읽고 합평하는 것을 배워온 나와 친구들은 누군가의 어떤 글을 집중해서 읽고 의견을 내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안다. 그래서 나는 이들이 나에게 쏟아주는 에너지를 사랑하면서도, 미안했고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나는 그 염려들을 뒤로하고 글 보여주기를 멈출 수 없었다. 나는 어느 때보다 집요했다. 나는 나 외에 또 다른 검수자가 내 인생에 마구 끼어들기를 바라며 글을 썼다.




  일상에서 느끼는 불안이 남들보다 높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지만, 공장에서 옷을 검수할 때마다 글을 쓸 때마다, 이런 일들 외에도 나의 방향과 결정에 확신이 들지 않을 때마다, 나는 누군가가 나에게 안심하라고 이야기해주길 기다렸다. 너의 셈이 맞고 너의 문장이 진심으로 이해된다고 말해주길 기다렸다. 그사이 내 양팔에 무거운 추가 하나씩 더해지고 계속되는 숫자 세기에 머리 한구석이 뻐근해지는 것도 모른 채. 생각해보면 공장 식구 중 아무도 나에게 거듭 확인하라고 떠민 사람이 없다. 맞다. 이건 분명 내가 만들어내는 숫자 지옥이다. 사실 잘못된 숫자는 시아게 집(옷의 마지막 손질을 하는 곳)에 가서도 바로잡을 수 있다.


  “언니가 책임감이 큰 사람이라서 그래.”

  “맞아. 그 일에 진지한 사람이라서 그래.”


  나의 글을 괜찮은 글로 확인받기 위해 부단히 노력할 때, 친구들은 초조해하는 나에게 설득 어린 말을 건네준다. 그리고 그 말을 듣다 보면, 나는 어느 순간부터 긴장을 풀기 위해 떠올리던 귀신의 얼굴이, 멍청하게 보이는 그 얼굴이, 사실은 진지한 얼굴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귀신이 당황한 이유 역시 다 열심히 세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끝내 문장의 마침표를 찍지 못한 채 잠시 글쓰기를 멈춘다. 그리고 굽은 등을 조금 펴고 기지개를 켠다. 나는 노트북의 빈 화면 위로 숫자 세는 귀신의 얼굴을 다시 그려본다.


  이제 와 이야기하지만, 나는 그 얼굴이 조금은 귀엽게 보이기도 한다. 언젠가 귀신의 얼굴에도 만족스러운 미소가 어리는 날이 있을까. 나는 알 수 없는 얼굴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상상하고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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