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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eens' English

캄보디아 씨엠립에서

by 도인


“그러니까, 네가 영어 때문에 불편해서 이 여행을 이제 그만하고 싶다는 의미야?”

H가 물었다.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잠시 숨을 고른다. 감정이 많이 소모되는 대화를 피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이제는 회피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도망치지 않고 문제를 마주 보겠다고. 그러니, 이 대화도 피해서는 안 된다.

“아니”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다. “네가 말을 너무 빨리 하고, 모르는 단어도 많고, 억양도 달라서…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이해가 안 될 때가 있어. 그래서 답답하고 불편해. 그런데 그게 대체 여행을 계속하고 말고 와 무슨 상관인 거야?"

H는 영국인이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고, 시를 쓰고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이다. 처음 대화를 나눴을 때부터 H의 영어는 무언가 달랐다. 같은 뜻을 말하더라도 매번 다른 단어를 선택했고, 어휘력이 탁월했다. H는 상황마다 새로운 표현을 꺼내왔고, 종종 유머로 이야기를 덧칠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 유머조차 미스터리였다. 유머란 그 자체로 지적인 언어의 장르다. 상황을 완전히 이해해야 한 번 더 꼬아진 의미를 즐길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아직 H의 문장을 따라잡기 바빴다.

나는 여느 한국인이 그렇듯 평생 미국 영어를 배우고 써왔다. 그래서일까? Queen’s English, 즉 영국 영어 앞에서는 철저히 무너졌다.

Queen’s English는 단순히 영국 영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BBC 뉴스에서 들을 법한 발음, 문법적 정확성, 고급 어휘의 구사 등 영국 내에서도 가장 정제된 영어를 뜻한다. 미국식 영어에 익숙한 나에겐 H의 단어 선택, 억양, 발음 모두가 장벽이 되었다. 예컨대 미국에선 ‘vase’를 베이스라고 하지만, H는 ‘바스’라고 발음한다. 그런 차이는 수없이 많았다. 심지어 알고 있는 단어도 못 알아듣는 일이 잦았다.

며칠 전의 일이다. 오후에 수영을 하기로 했고, 나는 지나가다 수영장 물에 발을 담가봤다.
“오늘 수영장 물은 따뜻하던데?"

"너 발가락 담가 봤어?”
“응? 뭐라고?”
“너 발가락 담가 봤어?”
“다시 말해줄래?”
H는 답답한 듯 아주 느리고 명확하게 말한다.
“I said, Did you put your toe in it?”
나는 멋쩍게 대답했다. “Yes, I did.”

H는 잠시 후 미안하다는 듯 사과한다.
“흠… 그래, 그건 좀 인색했어…”

호주에서 워킹홀리데이를 했을 때가 떠올랐다. 내 영어 실력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순간, 마치 어린아이를 대하듯 천천히 말해주던 사람들. 그들 중 일부는 참을성 없는 표정이나 경멸적인 눈빛을 숨기지 않았다. H는 그런 의도가 아니었겠지만, 그날의 H의 눈빛에도 어딘가 답답함이 담겨 있었다.

'그래, 나도 답답해.'

그날 밤, H는 잠들기 전 조용히 말을 꺼냈다.
“하루 종일 영어 하느라 머리 아프지?”
나는 솔직해지기로 했다.
“아니라고 말하긴 힘들어. 나 이 상황이 좀 불편해. 넌 나랑 많이 대화하길 원하는데, 네 말이 이해하기 어려우니까 답답하고… 불편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러니까 네가 영어 때문에 마음이 불편해서 이제 그만하고 싶다는 의미야?”

왜 H는 내가 뭔가 불편해할 때마다, 이 여행의 끝을 먼저 상상하는 걸까?

나는 아직 이 여정의 미래를 알 수 없다. 다만 확실한 건, 더 이상은 내 불편함을 숨기지 않겠다는 것이다. 언어가 다르고 표현이 다르고 억양이 달라도, 마음을 전하려는 노력만큼은 같은 언어로 통하기를 바란다.




2025.3.23

캄보디아 씨엠립에서 도인의 글과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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