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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고 나서야

캄보디아 씨엠립에서

by 도인

"그럼 내가 한국말을 배울게. 비빔밥, 김밥…"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H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어젯밤의 어색한 기류는 아직 공기 중에 머물러 있었다. 나는 조금 서먹했고, H는 미안함에 안절부절못한 채 밤을 보냈다.

"그럴 필요 없어. 내가 곧 적응할 거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나는 늘 생각해 왔다. 언젠가 H가 한국어를 배워야 한다고. 서로를 존중하려면 적어도 상대방의 언어를 배우는 시도는 해봐야 한다고.

"그래서, 너 어릴 때부터 여행 다니고, 수영도 배우고, 영어도 배웠다고 했지?"
H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오래전 기억 속으로 천천히 미끄러져 들어갔다.

초등학교 1, 2학년쯤이었을 것이다. 햇볕이 눈부시게 내리쬐던 봄날, 옆집 벽에 기대어 있는 자전거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저걸 타고 어딘가 모르는 곳으로 훌쩍 떠나고 싶다.
그 나이 또래 아이들은 친구들과 나가 노는 게 일상이었지만, 나는 혼자 어딘가 자유롭게 떠나고 싶었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되어서도 다르지 않았다. 담임선생님의 사회 수업이 지루해서 사회책 아래에 숨겨놓은 사회과 부도를 펼치고 세계지도를 하염없이 들여다보곤 했다. 머릿속에는 끝없는 지도가 펼쳐졌다. 그러다 어느 날, 정말 여행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구체적인 실천 계획이 되었다. 나는 엄마에게 무작정 졸랐다.
"윤선생 영어 시켜줘!"
여행을 하려면 영어를 잘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우리 집은 그때부터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형편이 좋지 않았다. 밥 먹는 것도 빠듯한 상황에, 윤선생 영어라니.

나는 그런 집안 사정을 알면서도 이건 놓칠 수 없다는 이상한 확신에 사로잡혀 있었다. 여행을 가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어쩌면 그때부터 나는 스스로의 가능성을 좇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배정받은 선생님은 무척 엄했다. 아침, 점심, 저녁. 하루 세 번, 각각 한 시간 반씩 영어가 녹음된 테이프를 들으라 했다. 나는 하루도 빠짐없이 실천했다. 아침 6시에 일어나 테이프를 듣고, 저녁에는 점심 분량까지 몰아서 3시간을 연달아 공부했다. 생각해 보면, 내가 가장 열심히 영어를 공부한 시기는 바로 그때였던 것 같다.

그 이후로 민병철 어학원도 다니고, 대학에 들어가서는 3학년을 마치고 휴학한 뒤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났다. 심지어 한국인들과도 영어로 대화하며 끝끝내 언어를 놓지 않았다.

어떤 일들은 그 일이 일어나는 동안엔 그 의미를 모른다. 우리는 그저 점을 찍을 뿐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그 점들이 선이 되고 그림이 되어 의미가 생긴다.
지금 H와 함께 그리고 있는 이 점들은 과연 무슨 의미일까?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우리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 걸까.
확실한 것은, 그 모든 점들이 지금 우리를 그리고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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