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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리타 한 잔과 은퇴

캄보디아 씨엠립에서

by 도인

“오늘은 근사한 곳에서 저녁 식사 어때? 네 은퇴를 축하하고 싶어. 마가리타 한 잔 같이 할래?”
바로 옆에 앉아 있는 H가 보낸 메시지를 읽으며 나는 잠시 웃었다.
‘그래, 나 은퇴했지. 진짜로.’

2025년 3월 1일, 나는 공식적으로 은퇴했다. ‘은퇴’라는 단어가 내 인생에 이렇게 등장할 줄은 몰랐다. 다른 삶을 꿈꿔보기도 했지만, 결국 퇴직할 때까지 일을 하게 될 거라고 믿어왔다. 그런데 나는 지금, 내 일에서 물러났다. 내 삶에서 한 발짝 멈춰 섰다.

사실 지난 몇 해 동안, 내 삶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일들로 가득했다. 알 수 없는 증상들, 끝없는 불면증, 몸과 마음이 함께 기울어져 갔다. 문제를 해결해 보려 온갖 방법을 시도했다. 병원을 다니고 약을 먹고, 심리학, 철학, 종교학, 뇌과학, 자기 계발서까지 닥치는 대로 읽었다. 민간요법도 써보고, 회사를 옮기고, 이사하고, 만나는 사람들을 바꾸고, 심지어 내가 즐기던 스포츠조차 다른 종목으로 바꿔봤다.

그러나 내 문제는 옅어질 뿐,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어떤 커다란 흐름이 모든 걸 죽음의 방향으로 끌고 가고 있는 듯했다.

불면증이 깊어지고, 지쳐갈수록 나는 하나씩 내려놓기 시작했다. 성공이라는 이름으로 움켜쥐고 있던 것들이 허무하게 느껴졌다. 죽음이 코앞인데, 도대체 그것들이 무슨 의미란 말인가?

그리고 나는 묻기 시작했다. 그래, 죽는다면? 지금 그렇다면? 이대로 괜찮은가? 지금 죽어도 아쉽지 않은가?

아니,
나는 단 한 번도 죽고 싶었던 적이 없었다. 죽기엔 아직 너무 아쉽다. 나는 잘 살고 싶은 사람이지, 결코 죽고 싶은 사람이 아니다.

그 순간부터 내 삶은 방향을 틀기 시작했다.
삶의 주도권을 회복하고자 했고, 진짜로 내게 중요한 게 무엇인지 묻기 시작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죽음이 닥쳐도 아쉬움 없이 떠날 수 있으려면 나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리고 떠올랐다. 내 인생에서 가장 나다웠던 순간.
가장 행복했던 기억. 내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였다. 조건 없이, 그냥 사랑했던 그 모든 순간들.

결심했다. 내 삶의 방향키를 다시 쥐기로. 죽음을 두려워하는 삶이 아니라, 죽음에 아쉬움이 남지 않을 삶을 살기로. 지금부터라도 최선을 다해 내가 원하는 삶을 살기로. 아낌없이 사랑하기로.

“마가리타, 좋지! 나 오늘은 그냥 좀 웃고 싶어. 나, 이제 정말 다른 삶을 시작해.”

H에게 답장을 보내며 나는 바깥을 내다봤다.
발코니의 노을이 천천히, 조용히 스며들고 있었다.
내 안에도 같은 색의 빛이 번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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