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겐 살인무기로, 또 다른 누구에겐 명검으로..
짝사랑하는 여자 앞에서 늘씬하게 두들겨 맞는 굴욕을 참아낸 박정달 씨..
있는 듯 없는 듯 고요한 존재, 힘이 없어서 더욱 고요해야 하는 존재인 그는 중년이 되어 온 일생 내내 쭈글이 같은 삶을 살았다. 자기주장 한 번 시원하게 하지 못하는 소심한 성격, 그래서 '없나?'하고 돌아보면 거기 늘 쭈그리고 있는 점 같은 존재, 그것이 힘의 논리가 작용하는 사회 속 그의 정체성이었다.
그런 그가 쫓기듯 사직을 당하고 퇴직금으로 난데없이 대장간을 차려 칼을 제작하기에 이른다. 그 칼이란 것은 부엌칼이나 문구용 칼이 아닌, 무려 울기도 하는 신검이라는 것.
그가 미친놈 소리 듣기 딱 좋은 그 허무맹랑한 짓을 감행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칼은 그가 어릴 적 쭈글이 시절부터 그의 내면을 지켜준 보호막이었다. 굴욕적 폭력을 당하던 그가 어느 날 가슴에 작은 칼을 품고 다니면서부터 묘한 용기가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칼에 대한 애정은 점점 집착으로 자라나 거금을 들여 각양각색의 칼을 수집하기에 이르렀고 급기야는 고차원적 정신을 담은 명검들에까지 손을 뻗게 된다.
그다음 전개되는 내용들은 약간의 무협소설을 보는 듯 박정달 씨가 자신의 일생일대 신검을 만들기 위한 온갖 고생스러운 여정들이 정신없이 펼쳐진다. 엄청난 검술을 가진 노인의 우연한 등장, 신비한 초능력을 가진 처삼촌에게서 전해받는 정신수련 등 쭈글이 박정달 씨는 그렇게 점점 도인이 되어간다.
그토록 고대하던 신검의 외형이 갖추어지고 완벽한 명검으로 탄생하기 위한 단 하나의 절차가 남았으니.. 바로 그 칼에 누군가의 피를 묻혀야 한다는 것. 칼은 본디 피를 그리워하는 습성이 있기 때문에 누군가의 피를 바쳐야 완벽한 신검으로 탄생할 수 있다는 것을 객지에서 온 또 한 명의 도인이 일러주게 된다. 그러나 주인공 박정달은 생명이 있는 것을 칼에 바치지 않겠다는 신념을 가진 자로 고뇌에 빠지게 되고, 결국은 자신을 희생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러나 어딘가에서 나타나 자신의 생명을 칼에 바치게 한 도인의 존재에 분노를 느끼게 되고, 그의 피로 자신의 희생을 대신하려 하지만.. 예정대로 그는 자신이 탄생시킨 신검에 의해 목숨을 잃게 된다. 그리고 도인은 박정달의 피로 완성된 신검을 들고 홀연히 사라진다.
박정달을 존재감 없는 쭈글이에서 도인으로 거듭나도록 한 칼이란 무기.
우리는 어떤 소명의식, 특출한 재능이란 이름으로 자신만의 검을 가슴에 품고 산다. 거지 같은 현실 속에서 그래도 숨을 쉬며 한 줄기 빛을 쫓을 수 있는 희망이란 것.. 가슴에 품은 칼이 어느 날 영험한 신검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소설 <칼>에서 혼자 웅웅 울기도 하는 신검이란 것은 단순히 개인적인 희망과 꿈이란 차원을 넘어서 하늘이 점지해준 천부적 소명을 뜻하는 듯했다. 세상의 이치를 깨달아 신검을 탄생시킬 수 있는 이는 하늘이 지정하고, 완성된 신검은 탄생시킨 대장장이도 더 이상 함부로 다룰 수 없는 절대적인 힘을 갖게 된다. 신검을 완성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려던 숭고한 정신이 변질되자 이내 자신의 신검에 의해 처단된 박정달의 최후가 신검의 절대력을 보여주고 있다.
소설 <칼>은 개인적으로 작가 이외수의 자전적 스토리를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품을 쓰기 위해 스스로를 골방에 가두기도 했던 노력들과 그것들을 대가로 쌓아 올린 오늘날의 명성.. 그는 가장으로서, 글쟁이로서 아직은 작았던 자신의 현실에서 희망으로 칼을 품고, 그것을 신검으로 탄생시키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왔을 것이란 생각이 훅 스며왔다. 현재 대작가로 명성이 높은 그의 작품들은 더 이상 그의 손이 닿지 않는 영역에서 많은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절대력을 가졌다. 박정달의 신검처럼.. 익히 알려진 명장들의 산출물도 모두 그러하다. 그것은 더 이상 개인의 소유가 아닌, 절대적 영향력을 가진 독립된 힘을 갖는다. 선과 악의 기준이 되기도 하고, 사람을 계몽하기도 하고, 사회적 판단의 잣대로 작용하기도 한다.
내가 좋아하는 '글'은 신검으로 성장할 수 있을까..
남 보기에 아직 젊고, 상대적인 고학력으로 가진 것이 많은 나는 그러나 최저생계비를 겨우 벌어 연명하며 '글'이란 칼을 품고 산다. 도심 한가운데 생뚱맞은 대장간을 차려놓고 신검을 만들던 박정달의 모습과 소름 끼치게 닮은 모습을 하고서.. 뭣이 중한지 깨달으며 살고 싶은 내게 사회는 그 많은 걸 쥐고서 바보처럼 왜 돈을 벌지 못하냐고 다그친다. 나는 신검을 보고 싶은데 그런 내 꼴은 언제나 우스운 구경거리가 되고 만다.
우리는 어쩌면 너무나 소중한 것들을 잊고 사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