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소나무는 견뎠고, 봄의 소나무는 즐겁다.
나이 마흔 가까이에 처음 가져보는 애정 하는 작가 한강의 어떤 책을 보다 이런 문구가 살포시 가슴에 와 앉았다. 그리고는 자연스레 지난여름 소나무를 미워하던 나의 기억을 가만히 건드렸다. 소나무는 그 작은 충격에 노란 송진을 톡톡 두어 번 털어낼 뿐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큰 미동도 없었다. 그리고는 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온몸을 차갑게 할퀴어 감고 지나가는 겨울바람에 자신의 온몸을 맡겼다.
다른 모든 나무들이 자신이 가진 최후의 나뭇잎 한 장을 내어놓을 때까지 여전히 푸르게 모든 걸 움켜쥐고 서있는 소나무.. 끝까지 놓지 못하는 그 탐욕스러움에 대해 왜 우리는 '늘 푸른 소나무'라며 영원함을 상징하는 건지 의아한 마음들을 써 내려갔던 지난여름.. 작가 한강의 이 한 문장을 읽고 문득 그때의 소나무 잎은 무슨 색이었을까 궁금해졌다. 봄에 갓 돋아난 연초록 여린 잎이 힘 있는 초록빛으로 변해가고 있었을까? 나름의 생명을 틔워내고 즐겁던 봄의 소나무는 혹독한 겨울을 견디기 위해 짙게, 더 짙게 힘을 비축하고 있었을 테지..
그런 소나무를 아주 가까이 들여다보지 않으면 그 빛깔이 어떻게 변해가는지, 그 단단함이 어떻게 무르익어가는지 좀체 알 수가 없다. 즐거운 봄의 소나무.. 견디는 겨울의 소나무.. 단지 그 한 문장을 읽었을 뿐인데 무언가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처럼 정신이 아뜩해져 왔다. 오해.. 오해라고 밖에는 말하지 못할.. 벚꽃이 화려한 봄날에는 사람들의 모든 시선이 벚꽃으로 향하는 외로움을 견디고, 주위가 모두 헐벗어 깊은 겨울잠에 들어있을 때는 그 깊은 외로움을 견뎌내는 그 소나무에게 나는 감히 말한 적 있었다. 끝까지 모든 걸 놓지 못하는 탐욕스러운 존재인지도 모른다고..
소나무를 오해한 것처럼 누군가를 깊이 오해한 일이 있었다.
“우리.. 풍등 날려볼래요? 한 번도 이런 거 해본 적은 없는데..”
연료에 불을 붙이자 이내 고이 접혀있던 풍등이 제 모습을 찾았다. 풍등이 제 모습을 찾을 때까지 조심스레 붙잡고 있던 그의 손이 풀어지자 풍등은 기다렸다는 듯 까만 밤하늘로 날아올랐다. 깊은 바다를 향해 작은 불빛을 반짝이며 순식간에 멀어져 갔다. 그와 나는 한동안 말없이 서서 그 불빛이 모두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그는 어떤 생각을 풍등에 담아 하늘로 띄웠을까? 너무나도 천사 같았던 이전 연인이 그리웠을까? 그래서 그녀에게 어떤 메시지를 담아 그곳으로 띄워 보낸 것이었을까?라는 생각들..
연인이 된 내 앞에서 이전 그녀와 같은 사람은 다시 만날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한 그였다.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일까. 그리고 나는 대체 얼마나 더 상처 받아야 할까. 정말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마음이 복잡했던 어떤 밤..
'겨울에 당신을 만나 다가올 봄과 여름, 가을의 계획을 세워서 그런지 앞으로의 시간들이 좀 더 따뜻하게 느껴졌지요. 풍등이 사라질 때 제가 소원한 것은 계획한 계절들이 쉽게 사라지지 않고, 다시 겨울이 돌아와 당신과 함께 그곳에서 다시 한번 사랑을 이야기하고 싶은 간절함이었어요.
떠난 사람을 아직도 그리워하고 있다면 당신에게 이야기하지 못했을 겁니다. 몰래 봐야 하는 사람이니까.. 나는 단지 우리가 함께 묻은 지난 이야기라서, 처음 만난 날 하얗게 쏟아지던 눈 속에 당신과 함께 묻어버린 과거라서 당신에게는 편하게 지난 일 이야기하듯 했었나 봐요. 단순한 생각과 말로 당신에게 생각지 못한 아픔을 준 것 같습니다. 부디 오해는 하지 말길 바래요' 오해가 사라진 그 어떤 밤..
소나무에 대한 오해.. 충분히 깊지 못했던 나의 옹졸한 마음.. 진초록 잎으로 당신의 겨울을 잘 이겨내고 연초록 여린 잎으로 다시 돌아온 즐거운 봄을 맞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