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에서 부모님께 물려받은 가업, 닭갈비집을 운영하는 주인공은 예술성 높은 시 창작을 갈구하는 시인이다. 먹고살기 위해 잘 되지도 않는 닭갈비집을 운영하며 '고작 닭갈비집 사장' 노릇을 하던 그의 앞에 어느 날 '남소요'라는 젊은 아가씨가 찾아든다. 달에 관한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며 달이 소재가 된 시를 줄줄 외는.. 보름달이 뜨는 밤엔 산 위에서 행글라이더로 비행을 하는 신비한 소녀..
어느 날 그녀가 홀연히 사라지고 달도 자취를 감춰버린다.
그런 천체가 언제 있었냐는 듯 밤에도 달은 뜨지 않았고, 달을 기억하는 사람도 더 이상 없었다.
오롯이 달을 기억하는 주인공 혼자만 달을 기억하지 못하는 세상 속에서 미치광이가 되어간다.
진실이 무엇이든.. 어쨌든 달을 기억하는 사람은 오로지 주인공 한 사람뿐이었으므로..
소설 속에서 '달'은 어떤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인간으로서 거스르지 말아야 하는 어떤 도덕적 원칙이나 규범 같은 것.. 그것을 거스르면 더 이상 '존엄한 인간'이기 힘든.. 금수와 별반 다르지 않은 존재로서의 그것이 되고 마는 그런 의미..
책을 덮고 나서 문득 그런 생각이 희미하게 스쳤다.
달을 기억하는 존재들은 너무 슬프고 외롭다. 이 세상에서 달은 더 이상 소중한 의미를 갖지 못하는데 그들은 여전히 달을 기억하고 이야기한다. 달을 기억하는 사람들과 만나고 싶어 한다.
추석 연휴가 끝나는 일요일, 효석문화제가 열리는 봉평에 다녀왔다.
마을 어디에나, 눈이 닿는 곳마다 소금이 흩뿌려진 듯, 싸락눈이 잠시 내려앉은 듯 하얗게 대지를 뒤덮은 메밀꽃의 향연.. 미움과 분노와 원치 않는 그리움이 얼룩진 더러운 마음이 청량한 가을바람에 씻겨 날아가는 것 같았다.
"저.. 음악사연 당첨자입니다."
포토존 앞에서 입구를 지키는 담당자에게 말을 건넸다. 그리고 그녀가 건넨 엄청나게 큰 붉은 리본 머리띠..
"이거 착용하시고 입장해주세요."
"네? 아.. 꼭 이걸 쓰고 들어가야 하나요? 저 혼자 와서 좀 창피한데.."
"괜찮아요. 이걸 쓰고 들어가셔야 DJ가 알아보고 사연을 읽어줄 거예요. 잘 어울리시는데요!"
효석문화제 가기 며칠 전, 그곳에 다녀온 블로거가 쓴 글을 보고 DJ박스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스스로를 응원하는 의미에서 떠나는 여행이니 사연이 당첨되고 신청곡을 듣는다면 그것만큼 더 좋은 추억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신청한 사연이 당첨되었던 것이다.
망설였는데 막상 빨간 리본을 착용하니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메밀밭 사이를 천천히 걸어 DJ박스가 열린 공간에 가 가만히 앉았다. 나무벤치에 착석하고 정확히 약 3분 만에 내가 쓴 신청사연이 최용진 DJ의 목소리를 빌어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안녕하세요. 저는 몇 달 후면 이제 곧 마흔이 되는 작가 준비생입니다. 28살에 결혼해 30대 중반까지 남들처럼 보통의 사회생활을 하며 평범하게 지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처음 마련해본 전셋집이 갑자기 경매에 넘어가고 동시에 남편의 부정한 사생활을 알게 되어 이혼을 하게 되었죠. 당시엔 정말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습니다. 모진 생각도 여러 번 했었죠.
그래도 사람이 살려면 다 어떻게든 살아지게 되는 모양입니다. 그 시기를 즈음하여 글을 쓰며 스스로를 위로하기 시작했고 최근에는 작가 등단을 위해 모 문학제에 단편소설을 응모하기도 했습니다. 어릴 적부터 글을 잘 써 학교 대표로 글쓰기 대회에 참가하던 아이였는데 인생의 여러 길을 돌고 돌아 결국 하늘이 준 재능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작가 등단이 쉽지도 않고, 아주 오래 걸리거나 혹은 영원히 불가능할지 모른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때론 조바심이 나기도 하고 포기할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글을 쓸 때 비로소 내가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어 이 길을 중단할 수가 없군요. 매년 가을이면 국내 다양한 문학제들을 돌며 이렇게 마음을 다잡습니다. 스스로에게 힘내라고 파이팅을 외쳐주고 싶습니다-
인생의 굴곡과 세월의 연륜이 느껴지는 최용진 DJ의 목소리.. 내가 신청한 옥상달빛의 <히어로>가 조용히 흘러나오자 사연을 듣던 난.. 결국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애인과 가족과 모두가 행복한 그곳 메밀꽃밭에서 누가 볼세라 눈물을 훔치는 여자..
옥상달빛의 <히어로>가 끝나자 연이어 머라이어 캐리의 <hero>가 흘러나왔다. 두려움을 몰아낼 영웅은 자신의 마음 안에 있다는 가삿말.. 내가 신청한 곡과 제목이 같은, 센스있는 최용진 DJ의 답가였다.
"이 사연을 읽으니 울컥하는군요. 저도 예전에 사업 말아먹고 죽을 생각으로 바다에 뛰어들었는데.. 살았습니다. 살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지는 모양입니다. 이 사연 제가 잘 가지고 있다가 신청자님이 훌륭한 작가 되시는 날 거하게 대포 한잔 사겠습니다."
그는 멋들어진 목소리가 아닌, 마음으로 사람들의 사연을 읽고 있었다.
"멋지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잠시 점심을 먹으러 자리를 뜨는 그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혹시 식사하셨어요? 안 하셨으면 같이 하죠! 여자 가수 분도 계시니 셋이 같이 국수 한 그릇 해요."
평소의 내 캐릭터라면 배에서 요동치는 소리가 나도 먹었다 거짓말을 하고 자리를 뜨는데 그날은 이상하게도 함께 식사를 하고 싶었다. 그렇게 함께 하게 된 점심식사.. 메밀면, 메밀묵, 메밀전병, 메밀만두, 감자떡.. 다 먹지도 못할 만큼 많은 음식과 막걸리 한 사발을 선물 받았다. 봉평에 혼자 왔지만 혼자 하는 여행이라고 전혀 느낄 수 없었던 따뜻함.. 모든 것을 잃고 목숨마저 내버리려 했던 사람이기 때문일까.. 그에게선 독한 냄새가 나는 인간의 욕심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달을 기억하는 자.. 이곳 봉평에서 또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이제 돌아가려고 버스 기다리고 있어요. 생각지도 못한 따뜻하고 좋은 추억 선물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고마운 마음뿐입니다. 모든 것이 사그라드는 가을입니다. 좋은 날 웃으며 뵙기로 해요-
달빛이 스민 그의 답신과 함께 보내준 몇 곡의 음악파일..
달을 기억하는 사람에게선 이런 느낌이 나는구나..
봉평에서 돌아온 지 나흘째.. 집을 나서는 내 귓속엔 계속해서 머라이어 캐리의 <hero>가 플레이되고 있다.
우울증을 치료하는 알약 대신 그때의 기억을, 인연의 따스함을 치료제로 복용하는 중이다. 등이 밀려 제대로 설 수 없는 만원 지하철 안에서 머라이어 캐리의 <hero>가 무한반복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