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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핸곰곰 Apr 04. 2019

#9. 결혼 준비 번아웃에 대처하는 (안) 현명한 사례

살을 주고 뼈를 취했... 나?

생각해보면 애초 무리였다. 원래 결혼 준비는 쉽지 않다. 맞춤 결혼식에 공들인다면 더욱 그렇다. 맞춤 결혼식을 만들기 위해 부모와 싸워야 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더군다나 나는 상견례 3개월 전에는 큰 수술을 했고, 무리해서 복학을 했다. 주변 상황들이 호의적이라면 공부와 결혼을 다 잡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은 지도교수와 면담 후 박살 났다. 복학한 지 일주일 만에 다시 휴학을 해야 하나 고민했지만 ‘어려서 결혼하는데 소속도 없으면 피곤한 말들이 나온다’는 엄마의 말을 흘려듣지 못했다. 그래, 정말 큰일이야 나겠어? 어떻게든 되리라는 행복회로를 굴리며 나는 휴학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역시나 감정 기복이 있었지만,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아빠랑 한바탕 하고 와서 그런가, 이번 생리 전 증후군은 좀 고약하네. 하지만 생리는 없었고 2주 후 생리 없는 지옥 같은 감정 기복이 찾아왔다. 호르몬 주사도 소용없이 기약 없이 생리주기가 밀리고 스트레스는 점점 심해졌다. 살이 쪘다. 낯빛이 잿빛이 됐다. 이제는 일주일에도 두 번씩 발작적인 기분이 왔다. 다시는 행복해질 수 없을 것 같았다. 사라져 버리고 싶었다. 회복되기도 전에 무너지기를 반복하니 마음이 완전히 바스러져버렸다. 연구실 휴게공간에 나오면 발코니 아래를 바라봤다. 여기서 떨어지면 죽으려나?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결혼하기로 약속한 사람을 잃은' 비극을 겪게 할 수는 없었다. 하물며 그게 추억의 장소에서 투신이라면.

그때쯤 B를 만났다. 짝꿍의 친구인 B는 나와 안면은 있었지만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한 적은 없었다. 언제 한 번 트위터 밖에서 만나야지 생각만 하는 사이. 결국 결혼식을 두 달 남기고서야 모였다. 우리의 대화는 트위터에 새로 올라온 고양이 사진에서 근방 카페 비평으로, 직장에 새로 들인 커피 머신으로, 직장과 연구실 한탄으로, 대학원과 결혼 준비를 동시에 못해먹겠다는 나의 하소연으로 넘어갔다. 학기 초에 휴학도 생각했지만 이른 나이에 결혼을 하는데 휴학생이면 잉여인간처럼 보일까 봐 못했다고 말하자, B가 받아쳤다.

"아~ 보기보다 남 눈치 많이 보시나 봐요"

네?

"어버버?"

전혀 예상치 못했다. 나는 B를 - 내적 친밀감과 별개로 - 어려워하고 있었는데 B는 아니었나 보다. 이렇게 짓궂게 말을 던진 걸 보니. 그리고 정곡을 아주 정확하고도 깊숙이 찌른 걸 보니.

‘이십 대 초반에 결혼하는데 학교도 안 다니고 있으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까 봐’라는 - 사실 내 것도 아니었던 - 나를 짓누르던 쓸데없는 걱정이 산산조각 났다. 처음부터 다시 생각했다. 이 상황을 어떻게 벗어나지?

대학원, 결혼, 우리만의 결혼식 셋을 다 가질 순 없다는 건 너무나 자명했다. 무조건 하나는 포기해야 했다.

파혼할 수 있을까? 결혼하려는 두 사람의 관계는 나쁘지 않은데 결혼 준비 때문에 힘들어서 파혼하는 게 과연 현명할까? 아마도 짝꿍은 정 힘들면 나중에 결혼해도 된다고 말했겠지만, 나는 만약에라도 파혼을 할 경우 우리의 관계가 무사히 흘러가리라는 자신이 없었다. 나는 이 사람이 내 인생의 상수가 되기를 원했고, 그 마음은 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흔드는 선택은 하기 싫었다.

결혼식 준비를 본격화하기 전, 또는 짝꿍의 위로를 받고 아빠와 싸울 용기를 얻기 전이었다면 우리만의 결혼식을 포기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 때는 이미 모든 얘기가 끝나 있었고, 준비도 거의 끝났다. 지금 이걸 없던 일로 하는 건 그야말로 바보짓이었다. ‘이래서 사람들이 싫어도 보통의 결혼식을 하는 거구나...’ 뒤늦게 깨달았다.

내가 포기할 수 있는 건 대학원밖에 없었다.

만약 내가 비슷한 처지의 지인에게서 이런 고민을 들으면 어떤 말을 해줬을까. 강한 의지 없이 대학원에 다니는 사람이라면 ‘포기해도 아쉬울 거 없네!’ 이 공부를 간절히 하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는 ‘지금 쉬어줘야 더 길게 공부할 수 있다.’ 성적이 썩 좋지 않은 사람에게는 ‘어차피 학점도 별로인 거 빨리 포기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성적이 좋은 2년 차에게는... ‘그래도 너가 정 힘들다면 어쩔 수 없지.’라고 했겠지.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아쉬울 것 없고 빨리 포기해버리는 게 나은 경우였다.

지도교수를 찾아갔다. 건강이 너무 나빠져서 그만두려고 합니다, 이번 학기는 어떻게 끝내보려고 했는데 그것도 무리입니다. 면담은 예상외로 아주 흔쾌히 끝났다. (“건강이 제일 중요하다!”) 연구실에서 나오는 순간부터 발걸음이 상쾌해졌다. 이게 미디어에서 그리는 퇴사의 산뜻함인가. 긴장이 풀리니 배가 고팠다. 아, 장어 먹고 싶다. 함께 폴짝거리며 장어집에 가면서, 나는 너가 하지 안/못 한 걸 많이 한다며, 휴학도 한 번 한 적 없는 짝꿍 앞에서 괜히 우쭐거렸다. 장어집에 도착했고, 나는 지글지글 구워지는 장어 사진을 찍었다. 짝꿍은 춤을 추며 장어 사진을 찍는 나를 찍었다.

이렇게까지 밝은 내 얼굴은 본 적 없었다.

잘 생각한 거 같아, 우리는 서로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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