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에서 우리가 서로 싸운 3박 4일 이후 여행은 조금 이상해졌다.
서로 말을 아낀다거나 침묵 속에서 밥을 먹는다거나 여행지에서 신기한 것을 봐도 대충 눈으로 훑고 만다거나. 여행이 조금은 김빠지고 식상해져버린 느낌이다.
이모는 엄마가 화를 낸 충격이 컸던지 나에게 "다음 여행은 엄마랑 둘이가라. 이모는 안갈꺼다."라며 낮게 중얼거렸다. 난 돌연 이모라는 존재가 크게 느껴져 "난 이모 없으면 절대 배낭여행 안나올꺼다."라는 손발 오그라드는 선언을 했다. 이럴땐 우리가 세명이라서 얼마나 다행인지. 이모가 밉긴 하지만, 그래도 이모가 있어서 이 순간 얼마나 다행인지. 아니, 이모가 없었다면 애초에 이 여행은 계획될 수 없었을 것이다.
엄마보단 조금 더 젊고, 조금 더 의욕적인 이모가 있었기에 이 여행을 추진할 수 있었다. 이모가 없었더라면 난 혼자 엄마를 모시고 다닐 수 없었겠지. 하지만 이모도 여행 중 싸움의 충격이 컸던지, 다신 우리 모녀와 여행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여행은 막장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번 도시는 둔황이었다.
둔황은 '명사산'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막고굴'로 유명한 도시이다. 우리 일행은 자위관에서 눈물의 화해를 했지만, 둔황까지 여전히 남아있는 감정의 찌꺼기를 가지고 왔다. 여기서 누가 누군갈 자극한다면 여행은 전쟁으로 변할 기세였다.
우린 숙소에 짐을 풀고 잠시 휴식을 취한 뒤 명사산으로 향했다. 명사산은 둔황 시내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사막산이다. 워낙 거대하고 볼만한 곳이라 많은 관광객이 찾는데, 실재로 가보니 과연 중국에서 가장 볼만한 것은 '자연'이라는 말이 실감 났다.
물론 그 자연환경을 찾아가 보면 자연 속에 바글바글 대는 중국인과 입장료에 또 한번 놀라게 되지만.
하지만 우리 일행은 타는 듯한 명사산을 말없이 걸었다. 장엄하고, 거대한. 난생 처음보는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지만, 우리 일행 중 말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혼자 낮게 "우와, 멋지네."라고 할 뿐.
우리의 여행은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선영아, 저쪽에 사다리가 있다. 우리 올라가자."
명사산의 꼭대기로 올라간 우리는 일몰이 시작되길 기다렸다. 일몰까진 1시간 남짓의 시간이 있었기에 우린 각자의 방법으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엊그제부터 말이 없던 이모는 휴대폰으로 고스톱을 치기 시작했다. 엄마는 사막 위에 스카프를 깔고 누워 멀뚱멀뚱 하늘을 바라봤다. 할일이 없어진 나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다가 그마저도 식상해져 엄마 옆에 누워 똑같이 멀뚱멀뚱 하늘을 바라봤다.
모든 것을 태워버릴 듯 사막을 뜨겁게 내리쬐던 태양이 어느새 명사산 서쪽으로 기울고 우리가 누운 자리에도 짙은 어둠이 깔렸다. 이모는 일몰쪽은 쳐다도 안 보고 고스톱을 치는 중이었다. 내가 이런 저런 질문을 했지만 그저 건성건성 대답을 할 뿐이었다.
붉게 타오르던 노을이 지고, 어스름한 빛을 지나 명사산에 완전한 어둠이 찾아왔다. 엄마와 나는 잠들어 있었고, 이모는 여전히 고스톱을 치고 있었나 보다. 이모가 나와 엄마를 깨웠다.
"언니야, 선영아, 일어나봐라. 하늘 좀 봐봐"
나는 이모의 말에 졸린 눈을 힘겹게 떠 실눈으로 하늘을 바라보니,
우와.
하늘에는 수백, 수천, 수억개의 별이 떠 있었다. 엄마도 덜깬 눈을 비비며 하늘을 바라보다 "우와!"라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우리가 자리를 깔고 누운 자리 위로 별들은 손에 잡힐 듯이 가까웠고, 주변은 모두 사막이었기에 우린 하늘에 붕 떠있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엄마, 이모. 내가 하늘에 떠 있는 것 같아."
"진짜 진짜"
우리는 2차원과 3차원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경험을 하며 손에 잡힐 듯한 하늘 아래 누워 서로 더 멋진 감탄사를 찾고 있었다.
"엄마, 이모. 우리 오늘 여기서 노숙할까?"
"그럴까?"
"싫다. 엄마는 춥다. 우리 좀 있다가 가자."
"계속 있고 싶지 않아?"
"그럼 질릴때까지 보고 잠은 숙소에서 자자."
하늘의 별들과 그 별들 사이에 내가 붕 떠 있는 기분은 절대 질릴 것 같지 않았고, 추워서 이만 돌아가자는 엄마의 말이 못내 아쉬웠다. 간만에 우리 셋은 다시 예전처럼 즐거운 세 자매가 되어 수다를 떨고 있었다.
이 곳에 사랑하는 엄마, 이모와 함께할 수 있어서 감사했다.
"엄마, 이모. 우리 같이 이 풍경을 볼 수 있어서 다행이다. 그치?"
"응. 나도 너희들이랑 와서 좋다."
"담엔 엄마랑 너랑 둘만 가라. 난 안갈란다."
"안돼. 이모 없으면 이제 배낭여행은 없어. 안갈꺼야."
우리 셋은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자매처럼 사막에 누워 하늘을 보고 수다를 떨다가 엄마와 이모가 춥다고 아우성을 쳐 아쉽게 사막을 내려와야 했다.
처음엔 사막산을 어그적어그적 걸어내려가다가 이모가 발을 헛디뎌 떼굴떼굴 굴렀다.
"이모! 괜찮아?"
라고 난 비명을 지르듯 불렀고, 이모는
"꺄악! 재밌다."
라고 소녀처럼 까르르 웃었다.
그리고선 일어나지도 않고 사막산을 그대로 온몸을 이용해 떼굴떼굴 구르며
"너네도 이렇게 해봐라! 진짜 재밌다."라고 해맑게 웃었다.
엄마도 이모 말을 듣더니 엉덩이를 대고 눈썰매를 타듯 사막산을 내려가며 꺄르르 웃었다.
"언니야! 우리 어렸을 때 뒷산에서 같이 눈썰매 탈때 같지 않나?"
"진짜 그때같노! 재밌다!"
두 브로콜리는 꺄악꺄악 소리를 내며 어린 소녀들처럼 사막산을 떼굴떼굴 내려갔다. 이모는 떼굴떼굴 내려가다말고 사막 산 중간에 걸터앉아 둔황 시내를 애잔한 눈빛으로 굽어보며 말했다.
그러고선 다시 온몸을 이용해 사막산을 떼굴떼굴 굴러내려가더니 끝에 다다라선 아쉬운지 입맛을 다셨다.
"엄마, 이모. 오늘은 사주시장에 가서 양꼬치 먹고 집에 갈까?"
"그거 좋지요."
우리 저녁메뉴를 '양꼬치'로 정하며 명사산을 양옆으로 끼고 걸었다.
그런데, 아.
명사산은 마지막까지 우리에게 멋진 것을 보여주려고 하는지.
어둠이 짙게 내린 명사산엔 가로등도 없었다. 짙은 어둠 속에서 사람들은 렌턴이나 스마트폰을 이용해 길을 찾고 있었다. 명사산에 걸터 앉은 사람들도 불빛을 비추며 저마다 하나의 별이 되어 있었다. 성격이 급한 이모는 나와 엄마 앞으로 나서 저벅저벅 걸었다. 하늘에는 수억개의 별이 쏟아질 듯 내렸고, 양 쪽 사막에는 걸터앉은 사람들이 비추는 휴대폰 불빛도 마치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그 풍경은 하늘의 별과 수만명의 사람들의 스마트폰 불빛이 경계없이 마주닿아 땅끝까지 별들이 흩뿌려
우리 모두 별빛 사이에 붕 떠 걸어다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했다. 나와 엄마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가는 이모의 뒷모습은 마치 별빛 사이를 걸어 들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이모는 별빛 사이를 용감하게 걸으며 우리에게 빨리 오라고 재촉하였고, 나는 이 풍경을 좀 더 눈에 담고 싶어 느릿느릿 걸었다.
살아가며 잊고 싶지 않은 순간이 있다. 오늘 엄마, 이모와 함께했던 명사산은 내 기억속에 절대 잊혀지지 않고
삶의 매 순간마다 생각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