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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린이 Jul 16. 2019

밤하늘의 별, 웃음, 그리고 해가 뜨고 지는 것

어쩌다, 수영

  한때 나는 건방지게도 감히 암이 '선물'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내 마음과 일상이 궤도를 이탈한 위성처럼 빙글빙글 돌다가 이제야 어렵게 다시 제 자리를 찾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안정적인 일상이 주는 편안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 무엇이든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들었다. 목의 흉터도 이제는 제법 옅어진 듯했다.

  

 이런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다시 암은 내 일상을  또 한 번 때렸다. 이번에도 저 멀리 궤도 밖을 벗어날 정도로. 나는 우주에서 빙글빙글 회전 중이고 당연히 수영은 한 달째 제자리 상태다.


  일하면서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은 인생의 팔 할을 '시터 이모님'에게 의지하게 되는데, 유능한 이모님의 영향력이 남편이나 친정엄마보다 절대적이다. 이미 몇 년 전 자궁경부암으로 수술하신 이모님이 이번에는 갑상선암이란다. 내가 갑상선암으로 수술대에 누운 지 정확히 1년째 되는 지금, 이모님은 같은 암으로 병원을 찾았다. 이모님은 당신이 겪어오신 고단한 삶의 궤적과는 반대로 언제나 긍정 에너지가 충전된 분이신데도 요즘 아침에 일어날 수 조차 없을 정도로 기력이 떨어지셨다. 그리고 병원에서는 이번에도 암이라고 했다. 이모님은 갑작스레 그만두셔야 했고 나는 또다시 달력을 펼쳐서, 내가 암을 진단받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나와 남편이 쓸 수 있는 모든 휴가와 친정, 시댁에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적기 시작했다.


  이모님과 부둥켜안고 울었다. '병원이 싫다'는 이모님이 또 한 번 수술대에 누워야 하는 상황이 기가 막혀서, 또다시 겨우 제자리를 찾은 내 일상이 지긋지긋한 갑상선암으로 흔들리고 있어서 울었다.  이제 다 괜찮아졌다고 방심했을 무렵 암은 1주년 생일이라도 맞은 것처럼 다시 내 앞에 불쑥 나타났다. 암은 영원한 고통도 아니지만 결코 선물도 아니었다.


  암 수술을 마치고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찾은 수영장에서 나는 여전히 킥판을 들고 허리에 헬퍼를 맨 채 수영장의 맨 끝 초급 레인에 서 있었다. 초급 레인에서 중급, 상급 레인을 바라봤을 때 느꼈던 그 부러움이 지금도 생생하다. 완벽한 스타트와 하이 엘보, 물개처럼 자유롭게, 그리고 쉼 없이 수영을 하는 이들에게서 느껴지는 여유가 물살을 타고 초급 레인까지 밀려왔다. 일종의 경외심이었다. 나는 고작 이 잔잔한 수영장의 수면을 헤쳐나가는 것도 이렇게 버겁고 괴로운데 그들은 마치 태어날 때부터 아가미와 지느러미를 달고 있는 것 마냥 여유로웠다. 어쩌면 나와는 다른 종류의 물에서 수영하고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리고 이제 초급 레인을 벗어나 중급, 상급 레인으로 향하는 지금은 그때 그 부러움이 얼마나 우습고 부질없는 것이었는지 알 것 같다. 다들 자기 레인 안에서 매 순간 숨차게 헤엄치고 있을 뿐 달라지는 건 없다는 것을. 수영장 물의 마법 같은 건 없었다. 수영장 물은 공평했고 누구에게나 버거웠다. 그리고 그 안에서 저마다 싸우고 있을 뿐이었다.


 이모님의 암 진단을 듣기 직전 회사 일로 여러 암환자들을 인터뷰할 일이 있었다. 오랜 투병생활을 한 H 씨에게 이런 바보 같은 질문을 던졌다.


"투병생활을 돌이켜 보신다면 회복된 지금 가장 크게 달라진 건 무엇일까요?"


 미욱한 내가 기대했던 건 힘든 일을 겪어낸 사람들만이 가진 어떤 대단한 깨달음,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무늬를 만들어내는 나무의 옹이 같은 것이었나 보다.


"가족 중에 아픈 사람이 있으면 웃을 수가 없잖아요. 가족들이랑 저녁을 먹다가 갑자기 터지는 웃음, 병실에서는 볼 수 없던 제주도 밤하늘의 별. 그리고 해가 뜨고 지는 모습이요."


 언제 들어도 진부하지만, 언제 들어도 옳은 말.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밤하늘의 별, 웃음, 그리고 해가 뜨고 지는 일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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