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한복판인데 소아과 진료가 이리도 어렵다니
2023. 4. 12. (수)
소아과에 다녀왔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첫째 꿀떡이가 뜨끈뜨끈했다. 열을 재보니 37.7도. 밥과 함께 해열제를 먹이고 정오쯤 되었는데 열이 떨어지긴커녕 40도. '아... 코로나로 고생한 게 불과 두 달 전인데.' 한숨이 절로 나온다. 설상가상으로 오늘은 동네 소아과 쉬는 날이다. 결국 차로 20분 거리에 있는 2차 진료기관 급 병원에 갔는데, 예약 없이 현장 접수를 한 탓에 대기자가 많아 무려 1시간 반을 기다리고서야 진료를 봤다.
진료는 금방 끝났다. 고열 빼고 특별한 증상이 없으니 이틀 동안 해열제를 먹으며 지켜보고 금요일에 다시 보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 주는 소아과 예약이 꽉 차 있어서 금요일에 방문할 때도 현장 접수를 하고 한참을 대기해야 한단다. 내일모레 또 1시간 넘게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수요일 오후에 금요일 오후 예약까지 꽉 차다니. 무슨 콘서트 예약도 아니고.
사실 동네 소아과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30분 대기는 기본이고 가끔은 아예 들어갈 틈도 없어서 근처 카페에서 대기하다가 간호사 선생님의 연락을 받고 뛰어가 진료를 보곤 했다. 그런데 상급 병원의 소아과를 다녀오니 '소아과 부족 현상'이 더 심각하게 다가왔다. 소아과 전문의가 4명이나 있는 꽤 규모 있는 병원임에도 환자가 이렇게 몰린다는 건 그만큼 소아과 환자가 갈 곳이 많지 않다는 뜻이니 말이다. 그리고 서울 한복판의 실정이 이렇다면 도대체 지방은 어떤 상황이란 말인가.
고열로 축 쳐진 꿀떡이를 안고 1시간 넘게 대기 의자에 앉은 채 바라본 소아과는 치열하고 또 안타까웠다. 그렇게 의자에 앉아 찬찬히 보니, 동네 소아과에 다닐 때는 보이지 않던 새로운 것들이 보이기도 했다.
말 그대로다. 대기하는 동안 수십 명의 아이들이 오고 갔는데, 아빠 혼자 아이를 데려온 건 내가 유일했다. 아빠로 보이는 분들이 2명 정도 있었는데 엄마와 함께 온 경우였다. 생각해 보면 동네 소아과에서도 평일에 아빠가 아이를 데려오는 경우는 없었다. 이렇게 평일 낮 소아과에 아빠를 찾아보기 어려운 걸 보면 아직도 육아휴직을 하는 아빠가 많지 않은 것 같다.
문화센터에서는 종종 아빠들을 마주치곤 하는데, 소아과에서는 아직 없는 것 같다. 아마도 문화센터는 한두 시간 잠깐 짬을 내어 '참여'만 해도 충분하지만 병원은 아무래도 아이와 평소 시간을 보낸 '주양육자'가 아이 상태를 더 잘 설명할 수 있기 때문에 아빠들이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사실 나도 육아휴직 전에는 아이와 단 둘이 병원에 가는 게 꽤 부담이었다. 평일에는 자기 전에 잠깐 보고 주말에만 잠깐 같이 있는 상황에서 아이의 상태를 연속성 있게 의사 선생님께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육아휴직을 한 지금은 내가 첫째의 상태에 대해 충분히 연속성 있게 설명할 수 있기에 별 걱정 없이 병원에 다닐 수 있는 것이다.
언제쯤이면 소아과에서 아빠들을 자주 마주치게 될까?
이건 반전이었는데, 생각보다 소아과에 엄마가 별로 없었다. 그럼 누가 아이들을 데려왔냐고? 바로 할아버지, 할머니들이었다. 대충 훑어보았을 때 돌아다니는 아이들의 절반 정도는 조부모님들이 데려온 것으로 보였다. 동네 소아과에서는 '누가 데려왔는지'를 딱히 신경 쓰지 않아 잘 몰랐는데, 오늘 접수처 앞에 가만히 앉아 대기하며 보니 조부모님들이 정말 많았다. 요즘 아이를 키우면서 맞벌이하는 가정이 많다고 언론이나 주변에서 자주 듣긴 했는데 오늘 병원에서 대기하면서 보니 정말 그랬다.
한 할머니가 기억에 남는다. 아이가 오늘 입원해야 하는데 할머니께서 입원수속만 본인이 하고 아이 엄마가 퇴근하면 저녁 늦게 '보호자 교대'를 하게 해달라고 하셨다. 대충 들어보니 입원 시 보호자도 코로나 검사를 해야 하는 원칙 때문에 중간에 교대가 어렵다고 간호사 선생님이 난색을 표하시는 것 같았다. 할머니는 '아이 엄마가 지금 회사에서 급하게 휴가를 쓰고 있으니 교대를 하게 해 달라'라고 계속 요구하셨는데, 결국 여러 명의 담당자들과 논의 끝에 어떻게 합의가 된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며 참 안타까웠다. 할머니야 딸이 부탁한 것을 어떻게든 관철하려고 노력하시는 것이었고, 간호사 분들은 원칙을 지키는 것이고, 또 직장에 있는 아이 엄마는 지금 얼마나 애가 탈까. 직장에서도 눈치 보이고 아픈 아이가 걱정도 될 것이고.
안 그래도 이래저래 힘든 직장생활인데 아이가 아프면 부모는 더 힘든 것 같다. 언제쯤이면 아이가 아플 때 직장에서 휴가를 승인받느라 애먹고 또 주변 눈치 보느라 애먹는 상황이 사라질까? 우리 부부도 언젠가는 맞벌이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남의 일 같지 않아 마음이 어려웠다.
처음에 설명한 그대로다. 오늘만 해도 예약자가 10분 단위로 꽉 차있었다. 거기에 현장 접수도 의사 1명당 20명 정도씩 실시간으로 차고 있었다. 평소 다니던 동네 소아과도 사람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상급 병원은 정말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도대체 이 소아과 전문의 선생님들은 하루에 몇 명의 환자를 보는 것일까?
소아과 의사가 당장 늘어나도 모자랄 이런 상황에 오히려 소아과 폐업이 늘어나고 있다니 정말 암담하다. 나도 아이를 키우기 전까지는 소아과 근처에도 가 볼 일이 없었는데, 아이를 키우다 보니 정말 소아과의 중요성을 피부로 느낀다. 면역력이 다 발달하지 않은 아이들은 자주 아프다. 가정보육 중인 꿀떡이는 그나마 덜한 편이고, 어린이집에 다니는 아이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한 주에 두세 번씩 소아과를 드나든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소아과는 점점 없어지고, 아이들은 몇 안 남은 소아과에 몰려가 오랜 시간 대기를 하고, 그 소아과에 남은 의사, 간호사 선생님들은 또 엄청난 업무량에 허덕이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 같다. 요즘 의대마다 소아과 지원율이 낮다고 하던데, 생각해 보니 지금까지 방문한 소아과들 모두 젊은 의사분들이 거의 없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10년 후가 더 걱정이고 20년 후가 더 걱정되는 상황이다.
솔직히 일반인인 내가 봐도 소아과는 사명의식이 없으면 선택하기 어려울 것 같다. 어린아이를 대상으로 해서 정상적인 문진 자체가 어려운 소아과 고유의 특성도 그렇고, 진료비가 수십 년째 동결되고 있다는 재정적인 측면도 그렇고, 나를 비롯한 젊은 부모들의 예민함도 한몫할 것이다. 오늘만 보더라도 아이 정보가 포함된 가족관계증명서를 가지고 와달라는 간호사 선생님의 요청에 '그게 왜 필요하냐. 꼭 필요한 거냐'라고 계속 반문하는 분도 계셨고, 간호사 선생님께 반말로 말씀하시는 분도 봤다. 아이가 아파 애가 타는 마음은 누구보다 이해하지만 바쁘게 뛰어다니는 간호사 선생님들께 '우리 순서는 언제냐'며 반복적으로 물어보시는 분들이나 항의하시는 분들도 생각보다 많았다. 사실 나도 대기한지 1시간이 지났을 때는 물어보고 싶었는데 너무 많이들 물어보시기에 꾹 참았다.
워라밸도 없고, 노력에 따른 적절한 보상도 없는데, 심지어 존중도 못 받으면 누가 소아과를 하려고 할까.
아이 부모인 나부터 바뀌어보련다.
오늘 소아과에서 오랜 시간 대기하며 많은 생각을 했다. 그리고 생각만 하면 뭐 하나 싶어 이제부터 조금씩 행동해보려고 한다. 내가 소아과 의사, 간호사 선생님들의 워라밸이나 보상을 개선해 줄 수는 없지만 적어도 아이 보호자로서 그분들을 '존중'할 수는 있으니 말이다.
앞으로 소아과에 아이 보호자로 방문할 때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 각별히 조심하기로 했다. 그리고 감사한 마음이 들면 그때그때 말로 표현하고, 가끔은 동네 소아과를 지나다 생각날 때 맛있는 음료라도 사다 드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안 그래도 곧 이사를 갈 예정이라 정든 동네 소아과를 떠나는 게 아쉽다고 아내와 이야기하곤 했는데, 떠나기 전에 꼭 소아과 의사, 간호사 선생님들께 소소하게나마 선물을 하고 가야겠다는 마음을 굳혔다.
'소아과가 부족하데'라고 발만 동동 구르면서 정부나 제도 탓만 하는 것보다, 각자의 자리에서 조금씩 행동하면 더 좋을 것 같다. 소아과를 너도나도 포기하는 상황에서 끝까지 책임감 있게 남아계시는 소중한 분들이 지금 우리가 매일 마주치는 소아과 선생님들이다. 나를 포함한 젊은 부모들부터 이 분들을 존중하는 문화를 만들어나간다면, '소아과 부족 현상' 해결의 작지만 훌륭한 시작점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