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사는 집 02> 운이 나쁜 한 남자를 구해주고 싶었다
지금에야 1+1 마케팅은 어딜 가나 볼 수 있지만, 90년대 초만 해도 상당히 파격적인 개념이었다. 나는 치토스란 과자를 아주 좋아했는데, 광고도 재밌었거니와 (선글라스를 쓴 체스터란 치타가 "언젠가 먹고 말 거야"를 외치며 늘 치토스 도둑을 추격한다) 이 과자가 그 시절엔 참 보기 드문 기발한 마케팅을 진행했기 때문이다. 이 과자 봉지 속엔 '꽝!' 혹은 '한 봉지 더'의 딱지가 들어있었는데, 만약 '한 봉지 더'가 나오면 그 날은 그야말로 축제였다. 9살 어린 마음엔 이렇게 운수 대통한 날이 없고,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뿌듯함이 있었다. 그리고 재빨리 그 한 봉지를 더 받으려고 동네 슈퍼로 전력질주를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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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의 ‘복불복 게임’을 경험하며, 인생의 운도 그런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건 엄마에게 아빠의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나서부터였다. 아빠의 아빠, 엄마. 그러니까 할아버지, 할머니는 참 좋은 분들이셨는데 (할아버지는 단양에서 존경받는 사업가, 할머니는 그 당시 유복한 군수 집 딸내미) 아빠가 세 살 때 교통사고로 갑자기 두 분 다 돌아가셨다고 했다. "아마 두 분이 오래 사셨으면 아빠의 인생이 달라졌을 거야" 엄마는 이야기를 전하며 안타까워했고, 그 뒤에 이 말도 덧붙였다. “그러니까 우리는 아빠가 외롭지 않게 더 많은 사랑을 줘야 해” 그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충격이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찔끔 눈물이 났다. 와 인생도 하나의 운수 게임인가? 아빠 엄마란 존재는 당연히 평생을 같이 살 사람, 누구에게나 주어진 선물이라 생각했는데 이런 예외가 있어? 이건 참 말도 안 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아빠에게 연민 같은 게 생겼던 것 같다.
물론 아빠는 아빠의 할아버지가 금지옥엽으로 키워주셨다고 전해 들었지만, 아빠는 뭔가 "운이 좀 부족한 사람"이란 생각은 내심 변함없었다. 당시 아빠는 공무원 세계에서 승진 때문에 엄청 고생을 하고 있었는데 (단양 출신 공무원이 청주에 와서 자리 잡으려 한다는 동료들의 텃세 때문) 그래서 아빠에게 뭔가 힘을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때까지 아빠와 굉장히 친했던 건 아니다. 내 기억 속 아빠의 존재감이란 늘 피곤에 찌들어있는, 호랑이 무늬 소파에 앉아 무심하게 티브이를 바라보는 사람이었다. 주말마다 아빠가 우리를 데리고 놀러 다녀도 난 엄마만 쫓아다니는 엄마 바보였다. 하지만 그 이야기 때문인지 자꾸 아빠가 신경이 쓰였다. 아빤 정말 고독한 사람이군 하며 옆모습을 훔쳐볼 때도 많았다. 그래서 나는 나름 큰 결심을 했던 거다. 매번 혼자 사러 가던 치토스를 아빠와 함께 사러 가기로 결심한 것. 난 호기롭게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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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 한 달을 다녔나? 하지만 치토스의 ‘한 봉지 더’는 얄궂게도 잘 나오지 않았다. 이건 매번 꽝 잔치였다. 나중엔 과자를 먹지도 않고 손을 쑤셔 넣어 딱지를 확인했는데, 그때마다 얼굴이 벌게져서 냉장고에 과자를 쑤셔 넣곤 했다. 난 오기가 생겼다. "그래, 너네 슈퍼에서 안 나와? 그럼 다른 슈퍼로 갈아타야지" 운이 좋지 않으면 땅의 기운이라도 바꾸는 게 절대 법칙! 나는 동네 슈퍼란 슈퍼는 죄다 쓸고 다녔다. 나중엔 슈퍼 아주머니들에게 “제발 치토스 말고 다른 과자 좀 사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렇게 매번 꽝이 나오는 실패로 허탈해질 때 즈음, '이젠 정말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또 다른 슈퍼로 갈아탔다. "두고 봐, 이번엔 내가 꼭 ‘한 봉지 더’를 찾아내고야 말겠어" 그때 이미 그것은, 단지 '한 봉지 더'의 의미는 아니었던 것 같다. 어린 마음에도 뭔가 짠했던 아빠의 운을, 어떻게든 내가 채워줘야지 하는 강한 열망이었다. 그리고 그런 소망이 드디어 통했을까? 진짜 그분은 우리에게 왔다. 스르륵 뜯은 과자에서 치토스 한 봉지 더! 그래서 또 사러 간 과자에서 치토스 한 봉지 더! 오메? 그리하여 또또 사러 간 과자에서 치토스 한 봉지 더더더? 캬아! 이건 왕건이었다. 그날 아빠와 나는 '한 봉지 더'의 딱지만 내리 다섯 번을 발견했고, “여태 이런 손님은 없었다”는 특급 칭찬을 받으며 기분 좋게 슈퍼를 나섰다. 그때 아빠가 한 말이 기억난다."우리 딸내미가 운이 좋아서 계속 당첨이 되네" 나는 씩 웃으며 나는 아빠의 그 말에 대꾸했다. "아니지. 아빠 운이 대따 좋으니까 내가 이렇게 당첨이 되지”
치토스 다섯 봉지를 안고 집으로 돌아오는 그 날은 내내 마음이 푸졌다. 길게 드리워진 붉은 석양마저 온몸을 따뜻하게 감싸는 느낌이었으니까. 사실 나의 요행 운은 그 ‘치토스 다섯 봉지 이후’ 론 딱히 없었던 것 같다. 나는 학창 시절에도 찍은 문제는 죄다 틀리는 ‘찍지 마 학생’이었고, 남들은 가끔 5만 원도 된다는 로또도 지금껏 수십 차례 꽝만 연발이다. 하지만 나는 우주에 간절히 소원을 빌면 언젠가 이루어진다는 '끌어당김'의 법칙은 믿고 있다. 시간 차는 있었지만, 치토스 5 봉지의 운수대통은 분명 우리에게 왔으니까. 아빠는 그해 엄청난 경쟁을 뚫고 드디어 승진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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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으로 소원을 빌어라. 머릿속에 그림을 그려라. 그것이 이미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라. 의심하지 말라. 항상 감사해라" 치토스 '한 봉지 더'의 사건을 통해 나는 9살에 이 끌어당김의 5대 법칙을 체득할 수 있었다. 덕분에, 운수란 건 분명 있지만 정해진 운수 따윈 없다고 생각한다. 운은 그야말로 움직인다. 언제든 변할 수 있다. 그리고 나의 믿음으로 더 강력히 키워나갈 수 있다.
그리고 뭐니 뭐니 해도 그 해의 최고 끌어당김은 아빠와 나 사이에서 발생하지 않았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