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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주 Nov 16. 2019

토끼코트와 리무진

<아빠가 사는 집 03>  싸구려 토끼코트를 사 온 그 남자의 뒷모습 




아직도 아빠를 떠올리면 흐뭇한 미소가 제일 먼저 생각난다. 아빠는 동그란 얼굴에 눈코 입이 동글동글한 귀여운 인상이었는데, 늘 얼굴에 미소가 있어서 "인상 좋다"는 말을 참 많이 들었다. 비단 주변 사람들뿐이겠는가. 이런 고객은 호객의 최대 타깃이기도 하다. 특히 90년대 골목마다 자리 잡은 트럭 장수 아저씨들께는 아빠가 거의 VVIP급이었다 보시면 된다.

아빠는 거의 매일 밤 검은 봉지를 손에 들고 왔다. 한 번은 다 곯은 귤, 또 한 번은 눈코 입이 성의 없게 붙여진 곰인형, 그리고 또 한 번은 무슨 족자와 도자기 같은 것도 사 왔던 것 같다. (상인 아저씨가 엄청나게 값어치 있는 물건이라 했다고) 뭐 그 정도까진 괜찮았다. 하지만 좀 심한 녀석도 있었다. 벌건 색상 (빨간색 아니다. 정말 거무죽죽한 색이 많이 섞인 촌스러운 벌건 색)의 이상한 코트를 내보이며 아빠는 말했다. "이거 진짜 비싼 모피코트야. 값도 비싼데 내가 X만원밖에 안 줬어"라며 녀석을 까만색 비닐봉지에서 꺼내 엄마에게 보여준다. 마침 부엌에서 오이를 썰던 엄마는 식겁을 했고, 어디서 그런 싸구려 토끼 코트를 몇만 원이나 주고 사 왔냐며 화를 냈다. 부부싸움의 기운을 눈치챈 언니와 나는 스멀스멀 방으로 기어들어가고 (당시 나 4학년, 언니 6학년) 이제는 부부의 관심에서 멀어진 그 코트를 보며 품평을 시작한다.


언니 왈, "아빠가 또 일 쳤네, 일 쳤어!" 그럼 내가 한 목소리로 받아친다. "아니 왜 자꾸 쓸데없이 돈을 낭비하는 거야?" 품평이 한창인 그 순간, 안방에선 큰 소리로 변명하는 아빠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래, 그냥 사준 거다! 노인네가 매일 그 트럭 앞에서 물건 파는 게 불쌍해서" 그럼 엄마의 빈틈없는 논리가 발사된다. "불쌍하다고 물건을 사줘요? 한두 푼도 아니고 얼마를 줬다고? 어휴, 매일 속아서 쓸데없는 물건이나 사 오고. 그거 어딨어? 그 이상한 코트?" 그때쯤이면 언니와 나는 조용히 눈빛을 주고받는다. 언니는 문제의 그 이상한 물건을 옷장 뒤로 숨겨버린다. 신경을 거스르는 것은 아예 안 보이는 게 상책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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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그런 사람이었다. 본인은 좀 손해를 보고 곤란한 상황이 생겨도 어떻게든 남을 도와주려는 사람.  그래서 아빠 주변엔 이래저래 부탁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잠깐 돈 좀 빌리면 안 될까? 하는 친척, 평소엔 연락도 없다가 어떻게든 공무원 연줄을 빌어 편의를 보려는 지인들까지) 
가 알기론 아빠는 합법적인 선에서 그 부탁을 다 들어줬다. 난 그런 아빠가 가끔 못마땅했다. 아니, 왜 그렇게 귀찮은 일들을 다 들어준대? 아빠가 직급이 높아지면서는 더더욱 자잘한 청원들이 많아졌는데, 딱히 얻는 것도 없는 아빠의 퍼주기는 무한정 계속됐다. 하루는 못마땅한 심정으로 물었다. "아빠! 왜 지 것만 쏙 빼먹고 도망가는 사람들 부탁을 다 들어줘요?" 그럼 아빠의 예의 그 흐뭇한 얼굴로 말한다. "도움 줘서 나쁠 게 뭐 있어. 그렇게 다 베풀면 언젠가 돌아오는 거야" 그 답을 듣고 생각했다. 돌아오기는 개뿔! 


사실 취업 시기에 아빠에게 좀 서운했던 적이 있었다. 자타공인 그 퍼주기 대장이 나에게는 인색하다고 생각해서였다. 26살 때 방송국 PD 시험을 봤는데 운 좋게 면접까지 가게 되었다. 한 관문만 통과하면 최종 합격에 가까워질 수 있었다. 때마침 친척 중에 그 방송국에서 PD를 지낸 사람이 있다기에, 아빠가 딱 한마디만 부탁해줬음 했다. "우리 딸이 거기 시험 보는데, 한번 주의 깊게 봐 달라고" 울 아빠가 대단한 정치인이나 사업가가 아닌데 그 정도 말을 하는 건 편법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빠는 한참을 망설이고 망설이다 결국 그 말을 하지 않았다. "네 실력이 모자라면 모를까, 그렇게 말하는 게 더 독이 되지 않을까? 잘 된다고 하더라도 나중에 발목 잡을 수 있고", "아니, 아빠! 나도 뒷거래, 청탁, 이런 거 바라는 거 아니라고요. 그냥 면접 보는 애들이 워낙 많으니까, 면접관들이 내 말 좀 한번 더 귀 기울일 수 있게 해 달라는 의도예요" 아무튼 그런 부탁은 일어나지 않았고, 면접은 똑 떨어졌다. 나는 어쩐지 억울한 심정이 되었다. 이런 젠장! 울 아빠는 꼭 남만 도와줘!

나중에 취업이 잘 되고 나서 아빠가 이런 얘길 했다."사람은 당당해야 하는 거야. 내가 좀 손해를 봐도 나는 뭐 하나 꿀림이 없어야지"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떠올릴  때마다 속으로 비틀리는 묘한 심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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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으면 장례식장에 누가 올까>란 책이 있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책방에서 여러 책을 뒤적이다 눈에 띈 책이다. 그 책을 다 읽진 않았지만, 나는 책 제목을 본 것만으로도 집에 돌아와 한참을 울었다. 아빠를 떠나보낼 때 장례식장에 있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생각나서였다. 아빠의 3일장 마지막 날, 회사에서 리무진을 보내왔다. 가시는 길을 명예롭게 하는 상조 서비스였는데, 내 뒤에 서 있던 한 무리의 아빠 지인들이 하는 말이 들렸다. "명우가 참 잘 살았어. 주변을 진짜 잘 살폈는데 말이야. 명우 품격에 딱 맞는 좋은 리무진이다. 그래 격이 딱 맞네!"

귀찮게 들러붙는 지인들에게 싫다는 호의를 베풀고, 정작 예뻐 죽겠는 막내딸에겐 프리패스를 주지 않은 아빠의 마지막 모습이란? 그래 사실은 정말 괜찮은 거였다. 아빠의 장례식장에 온 수많은 지인들은 우리에게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전했고, 3일 내내 장례식장을 떠나지 않으며 우리를 위로했다. 아빠가 학비 도움을 준 고향 후배, 구직에 도움을 받은 어려운 친척, 퇴사를 결심할 즈음 아빠의 밀착 조언으로 정착했다는 어느 직원까지. 아빠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사연도 참 가지각색이었지만. 그런 이야기를 전하는 그들의 마음은 하나로 다가왔던 것 같다. 아빠에 대한 진심 어린 감사, 애도, 그리고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깊은 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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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장례식장은 딱히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내 관심사는 늘 지금 당장의 이해관계 혹은 근시안적 거리의 손해 안 보기에 머물러 있었으니까. 지금도 뭔가를 양보하며 사는 것에 대해 어느 정도의 회의가 들긴 하지만, 아빠의 장례식을 치르며 나란 인간의 그릇에 대해 많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인가, 혹은 움켜쥐기만 하는 사람인가. 만약에 누군가를 위해 내어 줄 수 있다고 해도, 아빠처럼 늘 흐뭇한 얼굴로 그 과정을 즐길 수 있을까? 


벌건 색상의 토끼 코트는 분명 싸구려였지만, 그 코트를 담아 온 아빠의 마음만은 돌아보니 고급 모피코트였다. 만약 시간을 되돌려 그때, 그 당시의 아빠 엄마의 부부싸움에 끼일 수 있다면, 나는 이제 주저 없이 아빠의 손을 들어줄 수 있을 것 같다. "엄마, 이거 진짜 모피코트야. 잘 봐봐. 진짜 고급 상품이라니까?" 


한 가지 더! 아빠의 뒷모습은 또 하나를 남겼다. 프리패스를 받지 않은 둘째 딸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취업을 하고, 아직 잘 살아가고 있다. 호화롭진 않지만 어디서도 꿀리진 않는다. 내 몸 어딘가에 아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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