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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주 Nov 16. 2019

송혜교보다 둘째 딸, I feel Preety

<아빠가 사는 집 04>  눈 먼 자존감은 인생을 춤추게 했다 




유치하지만, 사춘기에 접어들며 나는 아빠에게 이런 질문을 자주 했다. "아빠, 내가 얼마큼 예뻐?"  


우리 아빠는 완벽한 딸바보다. 내가 두 살 때, 아빠는 한 약국 약사에게 "딸내미 이마가 백만 불짜리다"는 말을 듣고 가까운 약국보다 족히 두 블록은 멀리 떨어져 있는 그곳만 찾아갔다. 나도 늘 포대기에 동행되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그렇게 사랑을 담뿍 받은 딸내미는 얼굴에 관심 좀 생기는 나이가 되자 늘 질문을 퍼붓는다. "나 예뻐?", "쟤보다 예뻐?" 이 질문은 가끔 말도 안 되는 비교대상을 찾았는데 얼짱의 계보인 송혜교가 TV에 나올 때 같이 소파에 앉아있던 아빠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아빠 나 예쁘댔지? 그럼 송혜교보다 더  예뻐?" 아빠는 갑자기 얼굴에 화증을 내며 답했다. 


"당연히 우리 딸이 더 예쁘지. 그걸 지금 질문이라고 하는 거야?" 


                                                                          /

와우. 이건 정말 묻는 사람도 부끄럽게 만드는 눈먼 칭찬이다. 덕분에 153cm에 살짝 납작한 얼굴의 동양인 얼굴 딸내미는 눈먼 자존감으로 성장하게 된다. <I feel preety>란 영화를 아시는지?  <브리짓 존스의 일기>처럼 아주 통통하고 평범한 얼굴의 여성이 주인공인데, (그녀의 이름은 르네다) 그녀는 자신의 모습에 자신감, 아니 자존감조차 1도도 느끼지 못하는 백수다. 그렇듯 축 쳐진 모습으로 푹푹 한숨을 쉬던 르네는 어느 날 헬스교실을 찾게 되고, 강사의 구령에 맞춰 미친 듯이 자전거 페달을 구르다가 그만 자전거에서 뚝 떨어져 머리를 부딪히고 만다. 그리고 그만, 그대로 기절. 

재밌는 건 그녀가 기절했다 깨어난 그 이후의 상황이다. 르네는 다행히 그 어느 곳도 다치지 않았지만, 머리의 어디가 조금 잘못된 것인지 자신의 모습을 '뚱뚱한 르네'가 아니 '날씬하고 매력적인 르네'로 바라보게 된다. (실제로 그녀는 거울 속에서 모델을 뺨치는 아름답고 날씬한 여성을 발견한다) 오, 지저스 크라이스트! 하느님이 내게 이런 행운을 주시다니! 괴성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며 바로 거리로 뛰쳐나간 그녀는 언감생심 꿈도 못 꾸던 잡지사에 취직을 하고, 매일을 활기차게 일한다. 좀 과할 정도로 밝은 에너지가 넘치는 이 통통한 여성을 사람들은 처음엔 이상하게 바라보지만, (너무 과하게 자신감이 있는 거 아냐? 하는) 점점 그 에너지에 빠져들며 환호를 한다. "야! 르네는 참 멋진 여성이야"라고. 


                                                                       /

그것이 착각일지언정, 때론 이런 눈먼 자존감이 이 험한 세상을 버티게 해주는 것 같다. 그리고 아빠의 자존감 교육으로 나는 스스로 "예쁜 여자"란 착각을 하며 잘 살았다. 외모에 민감한 사춘기도 잘 이겨냈고, 서울로 올라와 인형 같은 외모의 초미녀들을 만났을 때도 별로 주눅 듦이 없었다. 중간에 빼빼 마른 여자가 되겠다고 옆길로 이상하게 샌 적도 있었지만, 곧 돌아왔다. 기본적으로 내겐 아빠가 심어준 '날 사랑하는' 중심이 있었으니까. 그 중심은 그 어떤 것에도 꺾이지 않는 우주 최강의 단단함이 있었다. 


비단 외모의 영역에서 뿐이었을까? 공부를 잘하지 못했을 때도 아빠는 내가 "머리가 좋아서 마음만 먹으면 잘할 수 있다"라고 한결같은 격려를 주었다. 심지어 나조차 내가 의심되는 순간이 올 때도, 아빠의 그 표정은 정말 1도의 의심도 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덕분에 어느 순간 나는 정말 공부를 잘하게 되었고, 그 이후의 생활도 마찬가지였다. 긴 백수의 시간도, 사회생활의 거친 풍랑에도 쉽게 휩쓸리지 않고 잘 살아남았다. 한때 <자존감 수업>이란 책이 큰 인기를 끈 적이 있었는데, 그 책을 읽으며 참 신기한 경험을 했다. 무언가를 굉장히 새로 배웠다기 보단 아빠가 내게 준 것들을 다시 확인하는 경험? 너무 감사하고 또 뭉클해졌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했다. 


한 권의 책 보다 더 위대한 건, 생활 속에서 교류되는 살아 숨 쉬는 이야기라고. 



                                                                         /


그러고 보니 아빠의 자존감 교육은 내 아이에게도 이어졌다. 아빠는 삼 년 동안 첫째 딸을 키워주었는데, 덕분에 이 녀석은 유난히 자신감이 넘치고 당당하다. "아이고, 어째 이런 것도 못해!" 하는 내 타박 따윈 전혀 노여워하지 않고 가볍게 통겨버린다. "괜찮아. 내가 마음먹으면 금방 한다니까?" 


예쁘다, 잘한다, 그까짓 것은 아무것도 아니 다를 반복한 이 조기교육은 딸아이에게도 자기 긍정을 제대로 만들어주었다. 난 아이의 표정을 볼 때마다 아빠를 떠 올리고, 가끔 부끄러워질 때가 있다. 아빠가 이런 상황이었음 뭔가 다르게 했겠지, 아빠가 이런 경우라면 따뜻하게 손을 잡으며 이야기를 해 주었겠지 등. 한글 공부 하나에도 인내심의 바닥을 보이는 나를 깊이 반성하고 또 반성한다. 그리고 그럴 때면 자상했던 아빠의 목소리가 못내 그리워지는 것이다. "아이고, 애는 믿고 기다려줘야 해"의 조언이라든지, "넌 멋지니까 잘할 수 있어!"의 나를 위한 동기부여까지. 


작은 것에도 일만 프로 이상의 리액션과 환호를 던져 준 그의 따뜻한 얼굴이 그립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를 다시 현실에서 들을 수 없다는 것이, 가끔은 죄다 거짓말 같고 한스러울 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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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흉흉한 기사가 심심치 않게 보인다. 세 살 배기 아이를 때렸다거나, 아이를 학대해 숨지게 했다 등의 끔찍한 일들은 거의 1분에 한 번 꼴로 네이버 뉴스를 장식하는 것 같다. 내가 자라던 때와는 너무도 달라진 21세기의 이상 공기에 가끔 무서워진다. 그립고 무섭다 못해 등골이 서늘해질 때가 있다. 


연예인과 유튜버가 인생의 워너비가 되는 세상에서, 과연 부모란 존재감은 몇 위쯤에 등극될 수 있는지 궁금하다. "BTS가 내 인생을 바꾸었어요"도 좋지만 "우리 부모님이 내 인생을 바꾸었어요"란 다소 진부하고 상투적일 수 있는 얘기가 더  많이 회자되고 전파되길 원한다. 나부터 내 자식에게 그런 부모가 되어줄 수 있는지는 아직도 숱한 의심과 회의가 들지만, 심지어 그렇게 작아질 때도 아빠의 목소리는 내 귓가를 짱짱하게 울리는 것 같다. "당연히 할 수 있지. 우리 딸이 대체 누군데 말이야"  


확실한 건, 아빠는 내 인생을 바꾸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바꾸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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