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사는 집 05> 다 하지 못한 이야기는 꿈으로 이어진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에도 자주 꿈을 꾼다.
아빠를 세종시에 있는 납골당에 모시던 날 첫 번째 꿈을 꿨다. 칠순 생일을 치르지 못하고 가셔서 생일 케이크를 올려드렸는데, 그날 꿈에 이런 장면이 나왔다. 아빠가 일찍 돌아가신 내 친구가 등장했고, 손에 핸드폰을 쥐고 있었다. 그리고 영상통화 버튼을 꾹 누르며 이야기를 했다. "승주야. 너네 아빠가 전화를 주셨네. 어서 통화해 봐"
그 순간 생일 케이크 앞에 고깔모자를 쓴 아빠가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어? 우리 아빠네! 하며 반갑게 인사를 하려는데 통화가 툭 끊겼다. 잠에서 깨니 그제야 실감이 났다. 맞다. 아빤 돌아가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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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꿈은 그 이후로도 자주 꿨다. 그건 약간 시리즈 형이었다. 처음엔 아빠는 좋은 곳에서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 말라는 꿈, 그다음엔 대화가 조금 길어져서 아빠와 거실에 앉아 두런두런 요즘 생활을 이야기한 꿈. 그다음엔 아빠가 돌아가셨다는 것을 꿈에서도 완전히 깨달아서, 혹시 아빠가 사라질까 봐 나타나자마자 꼭 끌어안은 꿈이었다.
처음엔 아빠의 모습조차 흐릿했는데, 점점 아빠와 말을 하고, 몸의 양감을 느끼고, 평소의 냄새와 온도까지 실감할 수 있었다. 물론 꿈을 꾸는 날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오늘 밤엔 꼭 만나게 해 달라 아무리 기도를 해도, 찾아오지 않는 날도 있었다. 하지만 아빠는 내가 요청해서라기 보단, 아빠가 필요하다고 느낄 때 찾아오시는 것 같았다. 특히 내 마음이 심각하게 서러워지거나, 좋지 않은 일이 있을 때 말이다. 그리고 어떻게든 아빠의 방식으로 위로를 해 주는 것이다. 함께 공원을 걷는다거나, 누워서 TV를 본다거나, 그냥 묵묵하게 내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그리고 그 시작은 늘 핸드폰 통화였다.
사실 꿈에서 돌아가신 분을 뵙는다는 게 어떤 것일지 상상할 수 없었다. 일단 아빠가 어떤 모습일지 몰랐고, 혹시라도 내가 무서워서 도망가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도 들었다. 하지만 확실히 꿈을 꾼 후로, 난 아빠가 더 기다려졌다. 늘 반가웠고, 그다음 만남이 기대되었다. 그렇다 보니 아빠가 나를 생각해서 이런 방법을 택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작은 딸이 놀라지 않고, 아빠를 만날 수 있는 방법. 평소의 습관을 통한 자연스러운 만남. 맞다. 그건 핸드폰 통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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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와 통화를 하는 습관은 스무 살 때부터 생겼다. 대학에 입학해 혼자 서울로 올라오면서부터다.
응석받이 둘째로 자란 탓에 나는 유난히 외로움이 많았다. 서울생활은 시트콤 <남자 셋 여자 셋> (99년도에 대 유행한 시트콤. 멋진 이층 집 하숙집에 훈남훈녀만 살며 썸을 탄다는 아주 환상적인 얘기) 같은 낭만이 가득할 거라 믿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일단 내 하숙집은 처음엔 아파트 거실의 반쪽이었다가 (아파트를 개조해 만든 하숙집. 셰어형이라 반만 썼다.) 주택 지하방으로 갔다가, 다시 작은 원룸형 기숙사로 옮겨졌다. (하숙집 비용 인상에 맞추느라) 공간이 자꾸 바뀌고 주거가 불안정하니 이상한 버릇도 하나 생겼는데, 그것은 내 미니 냉장고에 새우깡을 많이 사서 채워 넣는 거였다. 그거라도 채워 넣으면 마음이 뭔가 꽉 차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숙방에 놀러 온 아빠에게 냉장고를 보여주며 이 이야기를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주책없다. 아빠가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 싶다) 그 이후 아빠는 내게 더 자주 전화를 걸었다.
처음엔 하루에 한통 정도였는데, 나중엔 내 모든 동선을 꿸 정도로 하루에도 네다섯 통 이상이 되었다. 이런 아빠와의 통화를 좀 유별나다 바라보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혹시 넌 파파걸?) 덕분에 난 늘 아빠와 함께 있는 기분이었다. 하루의 일과를 얘기하며 마음을 털어놨고 외로움은 점차 옅어졌다. 언젠가부터 냉장고에 새우깡도 채워 넣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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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활도, 긴 백수 시절도, 이후의 직장생활에서도 하루의 시작과 끝은 늘 아빠와 함께하는 통화였다. 어느 날은 안부를 물을 밑천이 떨어져서 "아이고, 아까 그 이야기했잖아"하고 귀찮아하며 또 받고. 내 하소연이 길어지다 감정이 격해질 때면 괜히 아빠에게 짜증을 내기도 했다. "아빠, 지금 내가 욕한 그 인간 두둔하는 거야?" 혹은 "아빠에게 말해 뭐해! 만날 둥글게 살라고만 하지"하고 투정을 부리면서.
그럼 아빠도 잘 받아주다가 어휴~ 하고 끊는 날이 있었는데, 그럴 땐 또 마음이 미안해져 내가 먼저 전화를 한다. "아빠, 사실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말이야...". 하지만 전화를 끊고 나면 늘 나보다 먼저 문자를 보낸 아빠의 메시지를 확인하곤 했다. "우리 딸 힘들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막내딸을 응원해. 아빠가 다 못 해줘서 미안해" 아빠는 마음이 넓기도 했지만 한 없이 약한 사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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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하며 감정을 푸는 것은 인간 고유의 속성이지만 (특히 구비문학이 발전한 한민족의 특징이지만) 정작 그 말을 들어줄 상대가 점점 줄어드는 게 요즘의 현실이기도 하다. 특히 나이가 들면서는 부모에게도 내 속을 털어놓기 쉽지 않다. 나에게 실망할까 봐, 너무 민감한 주제라서, 또는 그 정도로 가깝다고 느끼지 않아서 등. 아무튼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머리가 굵어진 이후에도 부모가 내 상담의 1순위가 되는 건 내가 생각해도 드문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아빠는 내 친구도, 유명 정신과 선생님도, 점집 선생님도 뛰어넘었다. 정말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이건 대단함을 넘어 내겐 하나의 행운이었다. 나도 내 모든 순간을 아빠에게 공유했지만, 나도 아빠의 모든 순간을 듣고 이해할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 아빠를 떠나보낸 후 마음이 너무 아팠지만, 어느 순간 또 알게 되었다. 아빠와 참 많은 시간을 함께 했기에, 이렇게 남은 날들도 어떻게든 견디며 살아갈 수 있는 거라고. 100% 그를 사랑했기에 죄책감에 찌들어 살아가지 않는 거라고. 그래서 예전에도 아빠를 기다렸지만, 앞으로도 아빠와의 만남을 더 기쁘게 기다릴 수 있는 거라고.
정말 단 한순간도 아빠에 대한 나쁜 감정을 담아둔 적이 없다. 물론 자잘한 오해와 삐침이 있었지만, 그 또한 나의 일방적인, 단세포적 감정일 뿐이었다. 그건 내가 엄청나게 좋은 사람이었기 때문은 아니다. 반대로 우리 아빠가 나를 엄청나게 품어주었다 하는 게 옳다. 어떤 말을 해도 다 받아주고, 허허하며 같이 상의해 주는 사람. 작은 말에 부르르 감정을 끌어올리지 않으며, 늘 잔잔한 파도처럼 깊게 머물러준 사람. 아빠는 그 누구보다도 큰 우산이었고, 내가 지금까지 만난 모든 사람을 통틀어 가장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꿈을 통한 아빠와의 대화가 내 무의식이 만들어낸 혼자만의 생쇼일지라도, 그것조차 감사하다. 그만큼 아빠와 습관처럼 만든 일상이, 꿈으로 반복 재생되며 날 위로하고 있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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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아빠의 핸드폰은 정지시키지 않았다. 아마 이대로 계속 요금을 내고 살려둘 것 같다. 나는 아직도 아빠의 번호로 가끔 카톡을 남긴다. "아빠, 오늘은 아이들과 키즈 카페에 다녀왔어요", "아빠 오늘은 뭐 드셨어? 식사하시고 좋아하는 단 커피 좀 드셨을까?" 난 이 대화를 쭉 이어나갈 거다. 아마 호호 할머니가 되어 아빠를 만날 때까지 계속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대화가 이대로, 끊김 없이 이어진다면 아마 아빠와 나는 우리가 떨어져 있는 이 시공간의 차이조차 극복할 수 있을 거다. 어쩌면 아빠가 이런 말을 할지도 모르지. "야! 어째 한 말을 자꾸 또 하고, 또 하고, 또 하는겨? 너무 지겹게 말이야" "
아빠와 만나는 그 미래까지, 이 꿈의 동력이 이어지길 바란다.
오늘도 나는 아빠를 생각하며 기쁘게 잠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