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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독순 Oct 26. 2024

빈티지가 아닌 빈티지 옷가게(2)

은박이 벗겨진 복권

  나는 경제 한파가 한창일 때 빈티지 옷가게를 열었다. 사계절이 뚜렷한 나라에서 경제란 놈은 일 년 내내 겨울 한복판에만 상주하며 모두를 얼어붙게 했고, 그 탓에 하루가 멀게 폐업을 신고하는 점포가 늘어나고 있다는 기사가 포털 사이트 상단에 걸려 소상공인의 실태를 알렸다. 뉴스로만 접하던 현실을 나는 사업자등록증을 발급하기 위해 세무서로 들렀다가 실감했다. 창구 위에 달린 ‘창업’과 ‘폐업’의 팻말을 갈래로 ‘창업’ 쪽에 선 사람은 오로지 나 혼자였다. 바로 건너편 ‘폐업’ 팻말에 줄지어 선 어른들은 은박이 반절은 벗겨져 이미 꽝의 ‘ㄲ’까지 드러난 복권을 손에 쥔 어디 모자란 호구라도 발견한 듯 동정 섞인 눈길을 내게로 보내왔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 작은 공간을 개척했다는 현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기뻤고 마치 대기업에 입사한 것처럼 사업자등록증을 다각도로 찍어 친구들이 머무는 카카오톡 대화방에 띄워 흘려보냈다. 곧이어 친구들은 차례로 바람 빠진 축하 메시지를 건네 왔고 나는 그 바람 빠진 축하 메시지에 다시금 바람을 한가득 채워 넣어 재이에게로 전송했다.


  너 이제 정말 큰일 났다!


  이 문장이 재이가 건넨 첫 개업 축하 메시지였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재이는 누구보다 개업일까지 나를 적극 도와주었다. 보증금 천만원, 월세 백만원, 관리비 오만원, 권리금을 제한 점포를 찾기까지 재이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재이는 곰방대를 입에 문 맥아더 장군이 되어 종이 지도를 활짝 펼쳐 필시 노려보다 이공대학교와 교육대학교 틈새에 눌린 오르막 골목길에다 큰 원을 그린 뒤 그 안으로 나를 끌어다 진종일 데리고 다녔다. 세 번째 들른 부동산에서 공실이 난, 인테리어를 싹 끝마친 점포를 소개받았고, 재이는 호주머니에서 레이저 줄자를 꺼내 층고를 재고 바닥면을 반스 스니커즈로 툭툭 건드려가며 바닥재의 상태와 재질까지 면밀하게 점검했다. “도끼다시네요.” “에폭시가 필요하겠어요.” “층고가 높아 평수보다 큰 냉난방기도 필요하겠네요.” 같은 가격 조정에 일말이라도 유리할 만한 고급 용어들을 중개인 앞에서 머뭇대지 않고 발휘해내는 재이의 솜씨에 나는 한 발치 물러나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 굿, 굿, 하고 감탄했다.


  재이와 헤어지고 녹초가 된 채로 집에 돌아온 뒤로 나는 계속해서 낮에 방문한 그 점포가 머릿속에서 아른거렸고 혹여나 매물을 도둑맞을까 전전긍긍하다 그날 밤 결국 중개인에게 먼저 연락을 취해 계약금을 선지불했다. 그러자 무언가 대단한 일을 벌였다는 사실과 후퇴할 수 없다는 현실이 거품 문 파도가 되어 다시금 나를 공실이 난 그 점포 앞까지 밀어 세웠고 어느새 늦은 밤 골목 앞을 서성이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그제야 저기도 공실, 여기도 공실이 난 점포들이 하나둘 눈에 띄어 폐업의 늪에 빠졌다는 어둑한 불안감이 밤 파도가 되어 엄습했다. 불안이란 늪에 빠진 나를 건져낸 재이는 침착하게 앞으로 준비해야 할 것들을 하나하나 짚어주었다. 다행히 이미 인테리어는 갖춘 상태라 들어갈 물건만 채운다면 신경 쓸 거리는 많지 않아 보였다. 창업비용을 조금이나마 줄이기 위해 집기와 가구는 중고 거래 플랫폼을 통해 마련했다. 낡고 해진 중고 가구와 집기 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재이는 칼라 스프레이를 가져와 칠해주었고 그러자 낡고 해진 것들이 새것으로 둔갑해 나는 푹신한 소파 위에 홀로 앉혀둔 말 안 듣는 비글처럼 천방 뛰어다녔다. “재이야, 나 꼭 성공할게. 기대해.” 재이는 꼭 물가에 아이를 둔 엄마처럼 계면쩍게 쳐다보다가 제발 좀 잘해보라며 나를 폭 안아주었다.


  순간 햇빛을 모은 뒤 햇살만 쓱 빼낸 듯 기운이 빠져나가 재이에게 안긴 채로 잠들고만 싶었다.


  매장은 뒤뜰을 제외하면 실 평수는 열평 정도였고 총 다섯 개의 파이프 행어가 들어갈 넓이였다. 벽면은 집주인이 흰 페인트로 온통 칠해 개보수를 마친 상태라 테라조 바닥재 위로 에폭시 시공만 거치면 됐다. 여전히 휑한 매장 안을 빙 둘러보던 나는 마지막으로 면접을 본 새하얀 장소가 떠올랐다. 면접장은 탁자, 의자 외에는 아무런 것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옷 대신 사람이 진열되고 가격표가 붙어 팔리니까.


  지구인 중 87%는 자신이 원하지 않은, 그러니까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한다는 통계를 본 적 있다. 13%에 속한 나는 내가 행복해지기를 바라기보다 어느 누가 87%를 정한 건지 따져 묻고 싶어졌다. 통계의 함정은 언제나 그의 근사치에 머무는 자들을 비참하게 만들고 어느 편에도 속하지 못하도록 밀어낸다. 행복과 불행, 가난과 부자, 성실과 불성실, 희망과 절망, 명예와 불명예, 모든 갈래에서 한쪽에만 속한다고 믿는 지구인은 이 지구상에 얼마나 될까. 오로지 불행하고 오롯이 가난하고 오로지 불성실하고 오롯이 절망적으로 타고날 수 없는 게 인간인지라 우리 모두 아슬아슬 걸친 채 겨우 살아갈 텐데, 이상하게 사회는 둘 중 하나를 고르길 원한다.

  

  둘 중 하나를 고를 수 있는 건 삶과 죽음밖에 없던 나는 반드시 살아야만 했고, 살기 위해 얼른 텅 빈 이 공간을 다 채우고 싶단 욕심밖에 차지 않아 집기들을 매장 안으로 밀어 넣기 급급했다. 물론 가장 중요한 건 행어에 진열한 상품이라 나는 비행기 화물칸에 실려서 여기까지 날아온, ‘짝’이란 직사각형 모양으로 압축된 옷가지를 스레 나눠 분해하기 시작했다. 이 거대한 덩어리 속 각각의 개별적 옷은 마치 폼베이 화석처럼 말라 굳어 어떤 생명력도 느껴지지 않았고 저 깊숙한 안에서 셔츠 자락을 하나 당겨 꺼내면 코트 소매가 불쑥 튀어나오고 코트 소매를 하나 당겨 꺼내면 바지 밑단이 쓸려 나오고 바지 밑단을 하나 당겨 꺼내면 잔뜩 구겨진 티셔츠가 모습을 드러낼 때 혹여나 바퀴벌레나 여태 살며 구경해본 적 없던 외국 곤충들까지 머리맡으로 튀어 오를까 벌레 퇴치기를 한 손에 꾹 쥔 채 옷더미 속을 마구 헤집었는데 내 생각보다 상태가 깨끗했고 방부제 냄새도 참을만했다. “깨끗해, 깨끗해!” 내가 환호하자 재이는 침착하게 세탁은 꼭 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양손으로 엄지를 치켜세웠다.


  두 짝 분량의 옷가지를 분해해 하나하나 옷걸이에다 걸어보자 구겨진 것 외에는 꽤 그럴싸해 보였다. 모를 누군가가 보면 이제 막 생겨난 신생 팝업스토어로 착각할만했고, 그건 전적으로 빈티지 마니아가 아닌 내가 낡고 빛바랜 색채의 조화로움이나 앤티크가 무엇인지조차 전연 몰라 벌어진 해프닝이었다. 비트제너레이션을 통과해 탄생한 미드 센츄리 가구와 소품들, 독일제 팝 체어와 프랑스제 오크 탁자, 하와이 전쟁 이후 급속도로 미국 문물을 받아들인 아메무라와 그 속 아메리칸 캐주얼 스타일을 묻히고 활보하던 키 작은 일본 남자와 덧니가 솟은 일본 여자 들. 리바이스 501과 실크 스크린으로 나염된 챔피온의 맨투맨 티셔츠를 입고 체커보드 무늬의 반스 스니커즈를 지면에 구르며 온통 발광하던 하라주쿠의 거리 속에서 딱딱하지만 텅 빈 「Plastic Love」의 가사처럼 힘없이 방황하던 무형의 사조들은 일본문화개방 시기에 맞춰 우리나라 동대문시장까지 그대로 침투했다. 이름 모를 흑인 선수가 트웬티트리 백넘버를 달고 백보드를 철렁이며 허공 속을 휘젓던 빨간 운동화는 진품, 가품 가리지 않고 불티나게 팔려나갔고, 일명 스트리트패션은 명동 시내를 기점으로 가장 중요한 스케이트 문화만 쏙 빼놓은 채 모조리 형성되었다. 물론 나는 이 시대를 함께 관통하면서도 아무런 낌새조차 느끼지 못했고 그건 전적으로 하위문화가 내 발의 아래에만 존재한 탓이라 여겼다. 내가 관심에 둔 거라곤 볼륨 마스카라와 바비 브라운이 몰고 온 물광 메이크업, 트루릴리전의 직관적인 스티치 바느질과 화려한 지미 추, 마크제이콥스가 선보인 모던한 루이비통, 롤리팝과 함께 등장한 금속 플레이트가 박힌 MCM의 둥근 가죽 가방 아래로 부러질 듯 가느다란 강렬한 원색의 스키니진이었지만, 이 모든 상위문화 역시 나는 누려본 적 없었다. 모든 건 미디어 속에나 존재했고 당시 캠퍼스 안의 나는 여전히 푸른 청바지에 표백된 티셔츠만 고집하던 철 지난 포크 가수처럼 아무런 볼품이 없었다. 하지만 사회가 규명한, 대충 알파벳으로 축약된 세대 속에 한데 묶여 떠내려간 탓에 나 스스로는 무척이나 선진적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니까 바로 빈티지를 팔면서도 빈티지가 되지 않길 바라는 주인은 나만이 유일해서 왠지 행어에 진열된 이 헌옷들이 과거를 청산하고 미래만을 조우하겠다고 외치는 프런티어처럼 꽤나 근사해 보였다.


  “인제 소품만 사면 되겠어.”


  재이는 다음날 일찍 우리 집 앞에 나타났다. 중고로 산 10년식 소나타인데 조수석에만 앉으면 채 십 분을 넘기지 못하고 잠들기 일쑤였다. 잠이 들기 전 나는 우리 어디로 가는 거야, 하고 떠보았고 도착하면 알게 될 거야, 하며 재이는 일급비밀을 품은 우주비행사가 왕복선 꼭대기에 앉은 것처럼 핸들을 일자로 눌러 잡은 채 나아갔다. 시간이 멈춘 듯 스르르 내 눈이 감겼단 사실에 화들짝 놀라 동그랗게 눈을 뜨니 파란 바탕에 노란 글씨로 IKEA라고 적힌 행성, 아니 건물 한 채가 보였다.


  평일 한낮인데 인파로 북적였다. 모두 창업을 준비하는 건가. 그럴 리가 없지만 나는 나를 지나쳐가는 생명체에 하나하나 가상의 업종을 붙여 보았다. 카페, 삼겹살식당, 방탈출카페, 오락실, 족발가게, 셀프사진관, 동전노래방, 소품점, 세탁소, 레스토랑…… 그리고 이렇게 많은 종류의 업종을 내가 떠올리고 있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랐다. 평소 아무런 자각 없이 걷던 길들이 떠오르자 모든 게 생경하게 느껴졌고 그 길 속으로 들어가 장사를 시작한다는 현실이 여전히 믿기지 않았지만 나는 서둘러 조명과 선반, 탁자, 의자 등 가게에 필요한 모든 걸 챙겨 나왔다. 돌아가는 차 안에서 내가 잠들면 재이도 졸릴까 싶어 안간힘으로 버티려고 애썼는데 결국 나는 선잠을 이겨내지 못했다. 이른 밤이 되어서야 매장 앞에 도착했고 나를 깨운 재이가 늦은 밤까지 선반과 탁자를 조립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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