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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티지가 아닌 빈티지 옷가게(2)

은박이 벗겨진 복권

by 김독순

나는 경제 한파일 때 빈티지 옷가게를 열었다. 사계절이 뚜렷한 나라에서 경제란 놈은 일 년 내내 겨울에만 머물며 모두를 얼어붙게 했고, 그 탓에 하루가 멀게 폐업하는 점포가 늘어나고 있다는 기사가 포털 사이트 상단을 장식해 소상공인의 실태를 알렸다. 뉴스로만 접하던 현실을 나는 사업자등록증을 발급하기 위해 세무서에 들렀다가 실감했다. 석고텍스로 된 창구 천장에 달린 ‘창업’과 ‘폐업’의 팻말을 갈래로 ‘창업’ 쪽에 선 사람은 오로지 나 혼자였다. 바로 건너편 ‘폐업’ 팻말에 줄지어 선 어른들은 은박이 반절은 벗겨져 이미 꽝의 ‘ㄲ’까지 드러난 복권을 손에 쥔 호구라도 발견한 듯 신기한 눈길을 내게 보내왔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 작은 공간을 개척했다는 현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기뻤고 마치 대기업 입사에 성공이라도 한 듯 사업자등록증을 다각도로 찍어 친구들이 머무는 카카오톡 대화방에 올렸다. 친구들은 차례로 바람 빠진 축하 메시지를 건네 왔고 나는 그 바람 빠진 축하 메시지에 다시금 한가득 바람을 채워 넣어 재이에게로 전송했다.


너 이제 정말 큰일 났다!


재이가 건넨 첫 개업 축하 메시지였다. 그러나 언제나 그래왔듯 재이는 누구보다 개업일까지 나를 적극 도와주었다. 보증금 천만원, 월세 백만원, 관리비 오만원, 권리금을 제한 점포를 찾기까지 재이의 도움이 컸다. 재이는 곰방대를 입에 문 맥아더 장군이 되어 종이 지도를 활짝 펼쳐 필시 노려보다 이공대학교와 교육대학교 틈새에 눌린 오르막길에다 큰 원을 그은 뒤 그 안으로 나를 끌고 들어가 진종일 데리고 다녔다. 세 번째 들른 부동산에서 공실이 난, 인테리어를 싹 끝마친 점포를 소개받았고, 재이는 호주머니에서 레이저 줄자를 꺼내 층고를 잰 뒤 바닥면을 반스 스니커즈로 툭툭 건드려가며 바닥재의 상태까지 점검했다. “도끼다시네요.” “에폭시가 필요하겠어요.” “층고가 높아 평수보다 큰 냉난방기를 설치해야겠네요.” 같은 가격 조정에 유리할 만한 용어들을 중개인 앞에서 머뭇대지 않고 열변하는 재이의 언변에 나는 한 발치 물러나 엄지손가락만 치켜세워 감탄했다.


재이와 헤어지고 녹초가 된 채 집에 돌아온 나는 계속해서 한낮에 방문한 그 점포가 머릿속에서 아른거렸고 혹여나 매물을 도둑맞을까 전전긍긍하다 그날 밤 중개인에게 먼저 연락해 계약금을 선지불했다. 그러자 무언가 대단한 일을 벌였다는 현실과 후퇴할 수 없다는 사실이 거품 문 파도가 되어 다시금 나를 그 공실이 난 점포 앞까지 밀어 세웠고 어느새 늦은 밤이 되어 골목 앞을 서성이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그제야 저기도 공실, 여기도 공실이 난 점포들이 하나둘 눈에 띄어 폐업의 늪에 빠졌다는 어둑한 불안감이 밤 파도가 되어 엄습했다. 불안이란 늪에 빠진 나를 건져낸 재이는 침착하게 남은 시간 동안 준비해야 할 일들을 하나하나 짚어주었다. 다행히 기본 인테리어는 갖춘 점포라 물건만 채운다면 신경 쓸 거리는 많지 않아 보였다. 창업비용을 조금이나마 줄여보려 집기와 가구는 중고 거래 플랫폼을 통해 마련했다. 낡고 촌스러운 중고가구와 집기들에 재이가 칼라 스프레이를 꺼내 칠하자 금세 화려한 새것으로 둔갑했고 신난 나는 푹신한 소파 위에 홀로 앉혀둔 말 안 듣는 비글처럼 천방 뛰어다녔다. “재이야, 나 꼭 성공할게. 기대해.” 재이는 꼭 물가에 아이를 둔 엄마처럼 계면쩍게 쳐다보다가 제발 좀 잘해보라며 나를 폭 안아주었다.


순간 햇빛을 모은 뒤 햇살만 쓱 빼낸 듯 기운이 빠져나가 재이에게 안긴 채로 잠들고만 싶었다.


뒤뜰을 제외하면 매장의 실 평수는 열평 정도였고 총 다섯 개의 파이프 행어를 놓아둘 넓이였다. 벽면은 흰 페인트를 칠해 개보수를 마친 상태라 테라조 바닥재 위로 에폭시 시공만 거치면 됐다. 여전히 휑한 매장 안을 빙 둘러보던 나는 마지막으로 면접을 본 새하얀 장소가 떠올랐다. 면접장은 탁자, 의자 외에는 아무런 것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옷 대신 사람이 진열되고 가격표가 붙어 팔리니까.


지구인 중 87%는 자신이 원하지 않은, 그러니까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한다는 통계를 본 적 있다. 13%에 속한 나는 내가 행복해지기를 바라기보다 어느 누가 87%를 정한 건지 따져 묻고 싶어졌다. 통계의 함정은 언제나 그 근사치에 머무는 자들을 비참하게 만들고 어느 편에도 속하지 못하도록 밀어낸다. 행복과 불행, 가난과 부자, 성실과 불성실, 희망과 절망, 명예와 불명예, 모든 갈래에서 한쪽에만 속해 있는 지구인은 이 지구상에 얼마나 될까. 오로지 불행하고 오롯이 가난하고 오로지 불성실하고 오롯이 절망적으로 타고날 순 없어 우리 모두 아슬아슬 걸친 채로 겨우 살아갈 텐데, 이상하게 사회는 둘 중 하나만 고르라 한다.


둘 중 하나를 고를 수 있는 건 삶과 죽음밖에 없던 나는 반드시 살아야만 했고, 살기 위해 텅 빈 이 공간을 다 채우기에 급급했다. 나는 비행기 화물칸에 실려 여기까지 날아온 ‘짝’이란 직사각형 모양으로 압축된 옷더미를 스레 나눠 분해하기 시작했다. 이 거대한 옷더미 속 각각의 개별적 옷은 마치 폼베이 화석처럼 건조하게 굳어져 어떤 생명력도 느껴지지 않았다. 저 깊숙한 틈 안에서 셔츠 소매 자락을 당겨 꺼내면 뒤이어 코트 깃이 불쑥 튀어나왔고 코트 깃을 당겨 꺼내면 어느새 바지 밑단이 쓸려 빠져 나왔고 바지 밑단까지 당겨 꺼내고 나면 잔뜩 구겨진 아트웍 티셔츠가 자태를 드러냈는데 혹여나 그 속에서 바퀴벌레나 여태 살며 구경해본 적 없던 외국 곤충들이 살아 나타나 내 머리맡으로 튀어 오를까 벌레 퇴치기를 한 손에 꾹 쥔 채 옷더미 속을 마구 헤집었다.


두 짝 분량의 옷가지를 모두 분해해 행어에 걸어 놓자 꽤 그럴싸해 보였다. 모를 누군가가 보면 빈티지숍이 아닌 막 생겨난 팝업스토어로 착각할만했고 그건 전적으로 내가 빈티지 무드를 이해하지 못해 벌어진 해프닝이었다. 비트제너레이션을 통과해 탄생한 미드 센츄리 가구와 소품들, 독일제 팝 체어와 프랑스제 오크 탁자, 하와이 전쟁 이후 급속도로 미국 문물을 받아들인 아메무라와 그 속 아메리칸 캐주얼 스타일을 묻히고 활보하던 키 작은 일본 남자와 덧니가 솟은 일본 여자들. 리바이스 501과 실크 스크린으로 나염된 챔피온의 맨투맨 티셔츠를 입고 체커보드 무늬의 반스 스니커즈를 지면에 구르며 온통 발광하던 하라주쿠의 거리 속에서 딱딱하지만 텅 빈 「Plastic Love」의 가사처럼 힘없이 방황하던 무형의 사조들은 일본문화개방 시기에 맞춰 우리나라 동대문시장까지 그대로 침투했다. 이름 모를 흑인 선수가 트웬티트리 백넘버를 달고 백보드를 철렁이며 허공 속을 휘젓던 빨간 운동화는 진품, 가품 가리지 않고 불티나게 팔려나갔고, 일명 스트리트패션은 명동 시내를 기점으로 가장 중요한 스케이트 문화만 쏙 빼놓은 채 모조리 형성되었다. 물론 나는 이 시대를 함께 통과하면서도 아무런 낌새조차 느끼지 못했고 그건 하위문화가 내 발의 아래에만 존재한 탓이라 여겼다. 내가 관심에 둔 거라곤 볼륨 마스카라와 바비 브라운이 몰고 온 물광 메이크업, 트루릴리전의 직관적인 스티치 바느질과 화려한 지미 추, 마크제이콥스가 선보인 모던한 루이비통, 롤리팝과 함께 등장한 금속 플레이트가 박힌 MCM의 둥근 가죽 가방 아래로 강렬한 원색의 스키니진이었지만, 이 모든 상위문화 역시 나는 누려본 적 없었다. 모든 건 미디어 속에나 존재했다. 하지만 사회가 규명한, 알파벳으로 축약된 세대 속에 한데 묶여 떠내려간 나는 스스로 무척이나 세련됐다고 믿었다. 그러니까 바로 빈티지를 팔면서도 빈티지가 되지 않길 바라는 주인은 나만이 유일해서 왠지 행어에 진열된 이 헌옷들이 과거는 청산하고 미래와 조우하겠다고 외치는 프런티어처럼 꽤나 근사해 보였다.


“인제 소품만 사면 되겠어.”


재이는 이른 아침 나를 데리러 왔다. 중고로 산 10년식 소나타인데 그의 조수석에만 앉으면 채 십 분을 넘기지 못하고 잠들기 일쑤였다. 잠결에 나는 우리 어디로 가는 거야, 하고 떠보았고 도착하면 알게 될 거야, 하며 재이는 우주왕복선 꼭대기에 앉은 우주비행사처럼 핸들을 일자로 꾹 눌러 잡곤 끝없이 나아갔다. 시간이 멈춘 듯 스르르 감긴 눈을 뜨고 보니 파란 바탕에 노란 글씨로 IKEA라고 적힌 행성, 아니 건물 한 채가 보였다.


평일 한낮인데 인파로 북적였다. 모두 창업을 준비하는 건가. 그럴 리가 없지만 나는 나를 지나쳐가는 생명체에 하나하나 가상의 업종을 붙여 보았다. 카페, 삼겹살식당, 방탈출카페, 오락실, 족발가게, 셀프사진관, 동전노래방, 소품점, 세탁소, 레스토랑…… 그리고 이렇게 많은 업종을 내가 단번에 떠올릴 수 있단 사실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러자 순간 모든 게 생경하게 느껴져 나는 서둘러 조명과 선반, 탁자, 의자 등 가게에 필요한 모든 걸 챙겨 나왔다. 이른 밤이 되어서야 매장 앞에 도착했고 나를 깨운 재이가 늦은 밤까지 선반과 탁자를 조립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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