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티지를 참 좋아하시나 봐요?
이곳을 찾아온 손님은 대개 이렇게 말하곤 한다.
“빈티지를 참 좋아하시나 봐요.”
나를 위아래로 훑곤 마침내 결심한 듯 저기, 사장님이 입은 빈티지도 살 수 있을까요? 하며 용기 내어 묻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기대에 찬 손님들의 눈빛을 애써 회피하는데, 아니 빈티지 의류 씩이나 팔면서 정작 빳빳한 새것만 고집해 입는다고 고백하기엔 뭔가 범죄를 저지른 듯한 죄의식이 밀려와 난처한 표정으로 대신하면 그제야 손님은 멋쩍은 미소로 빈티지를 참 좋아하시나 봐요, 하곤 발치에 놓인 행어로 시선을 옮겨 간다.
그러면 나는 진종일 손님이 무심코 놓고 간 그 한마디에 안절부절하다 어느새 가게 문 닫을 시간이 다가와 문을 잠글 때면 ‘넌 도대체 이 가게를 왜 열었니’하고 내게 스스로 되묻게 되는 것이다. 자괴감이나 열패감 같은 텅 빈 감정은 아닌데 내 몸속에 찬 수분이 가게 문고리를 잡은 손끝만 남겨둔 채 모조리 증발해 건조한 공허만이 밀려온다. 빈티지 가게를 운영하려면 옷을 잘 입어야 해, 맞아, 하고 이 해답이 비밀번호가 되어 도어락 버튼에 대고 내뱉으며 문을 잠글 때면 나는 내 차림새를 흘끔 내려다보게 된다.
배가 불룩 나와 있다.(한 때 ‘볼록’일 때도 있었다고 한다.)
“빈티지 가게를 운영하려면 옷을 잘 입어야 해.”
개업을 앞두고 재이에게 자주 듣던 충고였다. 재이는 이 시국에 가게를, 더군다나 빈티지 옷을 팔겠다는 나의 무모함을 뜯어말렸다. 그중 저게 꽤 괜찮은 구실이라고 여겨 빈티지 가게를 운영하려면 옷을 잘 입어야 한다는 충고를 입에 달고 살았고 나는 한 번도 진지하게 돌아본 적 없던 나의 스타일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나는 1년 365일 중 200일 정도는 통이 넓은 청바지를, 100일 정도는 발목까지 오는 원피스를, 나머지 65일 정도는 투피스로 된 깔끔한 정장만을 입고 다녔다. 그러니까 정장은 순전히 입사 면접 탓이었다.
“재이야, 나 면접만 60번 넘게 떨어졌어.”
그러면 재이는 두 눈썹을 팽팽히 당겼다가 놓아버리듯 금속적인 어투를 쏘며 재차 빈티지 가게를 운영하려면 옷을 잘 입어야 한다며 나의 헛된 꿈의 표적을 관통했다. 우리는 결혼을 약속했고 나의 개업 행위가 우리 미래를 금가게 만들까 재이는 노심했다. 물론 재이가 정말 그런 염려를 했는지 따져 물어본 적은 없다. 다만 당시 나는 모든 일에 지쳐서 상대가 건넨 고언들을 아무렇게나 의역하곤 속어를 섞어 마구 퍼붓고 다녔다. 대기업 공채는 점진적으로 줄어드는데 서류 전형조차 넘질 못하는 나 자신이 부끄러웠고 급기야 점점 겁이 나서 주인공이 신입사원 역할로 등장하는 흔한 로맨스 드라마조차 못 볼 지경이 되었다. 드라마 속 주인공은 우여곡절을 겪다가 마침내 대기업에 입사하고 회장의 아들인 상무이사와 사랑에 빠져 사랑과 일, 돈과 명예까지 모두 쟁취해낸다는 신데렐라식 해피엔딩이지만, 내 인생은 내가 악역이라 결국 나 자신에게 모든 걸 빼앗길 처지였다. 언제까지 이 울타리 안에서 치고받으며 경쟁해야 하나. 이러다가 백수 도사가 되어 하늘 위로 승천하게 되는 건 아닌가. 만약 그렇다면 차라리 공기업을 넘어 천天기업인 옥황상제의 전속 비서로 배정받아 연금 대신 천금을 받으며 일하고 싶다고까지 망상하기에 이르렀다.
관찰 카메라를 집 안 구석구석에다 설치한 뒤 녹화 영상을 그대로 방영한다면 나는 영락없이 이 세상 누구보다 쓸모없는 존재로 비칠 게 자명했다. 늦은 오후에 일어나야만 하는 무직자의 비애를 아는 유직자는 결코 없어 그들의 눈 밖에 난 나는 그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게을러질 수밖에 없었다. 언제 취직할 거냐? 언제 시집갈 거냐? 이 둘은 아무런 연관도 없는데 어른들은 매번 잘도 하나로 이어붙였고 그럴 때마다 늙은 신조어인 ‘취집’만이 수면 위로 뻐끔 떠올라 거품처럼 바스라졌다. 이래서 취집, 취집 하는가보다, 하고 푸념했지만 이 역시 대기업 취직만큼 뚫기 힘든 경쟁자가 즐비했다. 그들은 하루에 여덟 시간씩 피트니스센터에다 할애하거나 강남에 자리한 피부과를 제집 드나들 듯하며 누구보다 자기관리에 힘썼다.
불성실한 나로선 우울감만이 밀려와 정체 없이 낯선 거리 속을 떠도는데 불현듯 어느 작은 서점 하나가 구원의 빛처럼 눈에 띄었다. 하얀 차양이 설치된 그곳에 이끌려 들어간 나는 내가 그토록 바라오던 한 권의 책이 섬광처럼 번쩍이는 걸 목도했다. 이건 성서다. 『게으름에 대한 찬양』. 주저 없이 집어 들었다가 금세 좌절했다. 그는 98세까지 살았고 하루에 삼천 단어 이상씩 기록했고 심지어 노벨문학상까지 받은 게으름과는 동떨어진, 성실하게 살다가 성실하게 죽은 백발 노인이었다. 이런 식으로 독자를 기만하면 안 된다고 열내던 찰나 덜컥 서류 면접에 통과했다는 메시지가 액정화면 위를 섬광처럼 스쳐 지나갔다. 이건 성서다.
재작년 아웃렛 백화점에서 산 특색 없는 투피스 정장을 휙 꺼내 입어 보았다. 다행히 그사이에 체중이 더 불진 않아 얼추 맞았다. 그리고 우주왕복선에 투입될 인류 마지막 구원자라도 된 듯 나는 모든 컨디션을 대면 면접 날에 맞춰 카운트했다. 늘 그래왔듯 엎지른 물처럼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새 통유리로 된 사옥 앞으로 나를 데려다 놓았다. 그리고 면접장에 입장했다. 한 명의 면접관이 세 명의 면접자를 상대하는, 새하얀 페인트로 깨끗이 칠해진, 오염된 침입자는 곧바로 걸러내겠다는 일념으로 그득한 백열 빛이 무한히 쏟아지던 곳에서 나는 이런 질문을 받았다.
“장점이 무엇인가요?”
백만 번이고 외운, 면접 예상 질문 중 하급 문항에 해당했는데 부모에게 등 떠밀려 퀴즈쇼에 참가한 어린아이처럼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얕은 날숨을 내쉰 면접관은 왼손에 쥐고 있던 은색 펜텔 만년필을 사무용 탁자에다 한번 굴려본 뒤 다음 면접자에게 내 질문을 스레 넘겼다. 저는 근면 성실하고 애사심이 강합니다. 남을 도울 때 행복을 느끼고 주변 사람으로부터 잘 웃는다는 말도 듣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는……. 바로 옆 2:8 가르마를 탄 짙은 눈썹의 면접자는 정말 근면 성실하고 애사심이 강하고 남을 도울 때 행복을 느끼고 잘 웃는 사람의 표정을 지어 보이며 자신의 강점을 하나라도 놓칠새라 모조리 부여잡은 채 낱낱이 말로 꿰어내 이어나갔다. 나는 눈물이 터질 뻔했다. 어떻게 얻은 대면 면접인데. 그리고 그 뒤로는 내게 아무런 질문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날 재이에게 넌지시 다시 물어보았다.
“재이야, 나 정말 그렇게 옷을 못 입어?”
“응.”
아주 재수 없게도 재이는 개업을 결심하기 전날까지도 내 선택을 두고, 두고두고 반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