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얼마 전 딸과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다시 봤다. 3번째 같이 보는 영화라 약간씩 졸면서 본 듯 하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부모는 참 비호감이다. 치히로에게 어떤 좋은 영향도 주지 못하는 것 같은. 치히로에게 오히려 짐이 되는 존재 같이 그려진다(오죽하면 돼지로 묘사했을까...). 하지만 동화나 영화 속의 부모가 종종 비호감으로 그려지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마틸다>, <찰리와 초콜릿 공장>, <윌러비 가족> 등등. 부모로서는 이런 만화나 영화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영화 속 부모의 모습은 내 모습이 아니니 상관 없다고 치부하기에는 왠지 꺼림칙했다.
그 주에 쓴 딸의 일기장을 보며 여러 생각이 교차했다. 딸의 생각이 많이 자라고 있음에 감사하고, "이름"의 의미도 함께 고민하게 된다(딸에게 브런치 게시 허락 받았습니다 ㅎㅎ 본인도 본인 글이 쫌 맘에 들었나봐요 ^^).
딸의 일기를 본 후 어마어마한 찬사(건강한 자기애를 위해서!)를 보낸 후 딸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나: 여기 너가 주변에 이런 사람을 봤다고 했잖아. 진짜 자신을 찾아서 행복한 사람 말야. 누군지 말해줄 수 있어?
딸: (가만히 나를 보더니) 엄마.
나: (깜딱 놀라며) 나라고?!!
딸: 응. 엄마는 엄마 자신을 찾았잖아.
가끔은 우리 딸이지만 쫌 무섭기도 하다 ㅎㅎㅎㅎㅎ. 엄마가 제2인생을 시작하는 의미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듯 딸의 한 마디가 참 든든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딸이 내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있다는 사실에 왠지 모를 긴장감도 느꼈다. 블로그 세상에서 나는 내 이름을 '지음'으로 지어주었다. 이름은 부모에게서만 받는 줄 알았는데, 내 이름을 내가 짓다니. 이런 과정만으로도 왠지 모르게 기분이 뿌듯해졌다. 부모와 관계 없이 개별적 주체로서 살아도 된다는 나 자신의 허락 같은 느낌이 있다(그래서 치히로의 부모님을 돼지로 묘사했을까? ^^;). 이런 나의 모습을 보며 딸은 엄마가 '진짜 나'를 찾아간다고 느꼈다니 아무튼 나로서는 감사했다.
그러나...감사함 뒤에 반전이 있었으니.
기분이 한껏 좋아진 나는 딸에게 다시 물었다.
나: 그럼 일기에서 네 주변의 행방불명된 것처럼 보이는 사람은 누구야?
딸: 오빠.
오.마이.갓.
사춘기가 더디 오고는 있지만 나름의 사춘기를 겪는 오빠를 보며 진짜 자신이 행방불명된 것처럼 느껴졌나 보다. 음.......생각이 많아졌다. 딸이 그렇게 느끼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엄마 노릇이 처음이라 첫째인 아들한테는 늘 서툴렀다. 좋은 걸 주려고 해도 거칠고 투박했다. 그리고 내가 생각한 좋은 것을 주려다 보니 아들이 좋아하는 것은 잘 묻지 못했다. 아들이 초등학교 고학년이 지나서야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나의 속도와 나의 방법으로 아들을 키워 왔다는 걸. 엄마의 속도와 방법을 아들이 원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걸.
이런 내 모습을 마주하며 한 동안은 많이 낙심했다. 심리학 공부와 상담을 실제로 하기 시작하면서 수용하고 공감하려 노력하지만 늘 실수가 발생한다(오늘 아침도 발생 ㅠㅠ). 실수가 발생한 후에야 뒤늦게 깨닫고 수습한다. 핸드폰 사용으로 신경전을 벌이면서도 일단 빨간 불이 들어오면 잔소리부터 나간다. 휘유...그럼에도 예전보다는 빨리 인식하고 아들과 나 사이에 생긴 균열을 먼저 복구하려 노력한다.
아들은 실수투성이인 엄마를 마지못해 또 봐주는 듯 했다. 사춘기이기 때문에 부모를 이기려고 하는 모습이 당연함에도 아직도 아들에게 마냥 져주지는 못하는 내 모습을 보게 된다. 아들의 저항은 진짜 자신으로 살기 위한 몸부림일텐데 말이다.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느끼는 사춘기 시기는, 새로운 정체성으로 거듭나는 시기이기도 하다. 아들의 표현에 따르면, 사춘기는 생각할 사, 봄 춘, 그러니 "생각의 봄이 오는 시기"란다. 부디 아들이 생각의 봄을 만끽할 수 있도록, 치히로처럼 진짜 자신을 찾을 수 있도록, 그 과정에서 내가 돼지 같이 후진 엄마가 되지 않도록 마음을 잘 다스려야겠다. 근데...후진 엄마가 되지 않으려니 몸에 사리가 생기는 것 같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