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했다. 멀쩡하게 회사 생활을 하던 중에도 혹시나 일이 잘못될까봐 전전긍긍했고, 그 누구도 내 탓을 한 적이 없지만 스스로를 다그쳤다. 회사에서 능력을 인정 받을 땐 한없이 기분이 좋고 아무런 반응이 없을 때는 잘 해내지 못한 일들만 들춰냈던 20대를 지나, 30대가 되어 퇴사를 하고 어딘가에도 정식적으로 속하지 않은 사람이 되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잘하고 있다"는 칭찬을 스스로에게 해 줘야만 했다.
살아오면서 나의 오른쪽 팔 하나 정도는 책이 만들어줬다고 생각해왔다. 말을 더듬기 전 목이 막힌 느낌이 들 때, 진짜 하고 싶은 말은 A인데 내뱉기 쉬운 말을 고르려 B를 말할 때마다 글을 읽고 쓰는 일이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할 수 있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회사를 그만두기로 결정할 때쯤 생각해봤다. 그렇다면 내 왼팔을 만들어 준 것은 무엇일까? 내가 책 이외에 자주 말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영화, 드라마, 그리고 커피. 영화는 중학교 때부터 내가 타인의 세계를 받아들이고 이해하게 만들어 준 매체였고 드라마는 성인이 되어 나의 저녁 시간을 외롭지 않게 채워 주었다. 그리고 커피는 나의 일상이었다. 카페인을 채우기 위해 마시는 숭늉 같은 커피가 아니라 나를 기분 좋게 만들어주는 커피.
자취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내 돈을 주고 산 가전제품은 커피 메이커였다. 파주 구석에 있는 로스터리 카페에서 원두를 사고, 원목으로 만들어진 수동 그라인더로 커피를 갈고 주말마다 기계로 커피를 내려 마셨다. 크레마가 없는 부드러운 커피를 마실 때마다 진짜 어른이 된 것 같았다. 그때부터 분위기가 좋은 카페, 그리고 '커피가 맛있다'는 카페를 줄곧 찾아다녔다. 처음에는 고소한 원두만 선택했고, 원두 본연의 향이 익숙해지면서 어느 순간 향미가 더욱 풍부한 커피를 선택하게 되었다.
퇴사를 앞두고 친구들과 방문한 적 있던 카페에서 원데이클래스를 한다는 소식을 봤다. 원데이클래스를 자주 하는 카페는 아닌 것 같은데, 왠지 운명적으로 느껴져 용기내어 DM을 보내 클래스를 신청했다. 정원이 5명이라고 했는데...! 카페에 도착했을 때는 사장님과 나 둘만 있었다. 낯 가리기 전과 후가 많이 다른 나는 경계가 풀어지기 전까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척하면서 그 사람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버릇이 있다. 지각한 다른 수강생이 도착하기 전까지 사장님과의 어색한 대화가 이어졌고, 수업을 시작하며 커피를 내어주신다는 사장님께서 맛있는 산미 있는 커피를 내려주셨다.
그리고 브루잉 커피에 대해 배웠다. 집에서도 커피를 맛있게 내리는 방법. 생각보다 원리는 간단했다. 따뜻한 커피는 원두 양이 더 적고, 아이스 커피는 얼음이 녹는 것을 감안하여 원두 양을 늘린다. 첫 추출을 시작하기 전에는 원두를 적셔 뜸을 들인다. 첫 추출, 두 번째 추출, 세 번째 추출까지 하고 나면 내가 마실 수 있는 '커피 한 잔'이 완성된다. 그렇지만 중요한 건 물을 내릴 때 '동그랗게' 그려야 한다는 것이다. 작은 원을 시작으로 큰 원, 그리고 다시 작은 원으로 돌아올 때까지 예쁜 원을 그려야 한다. 언젠가 내가 손재주가 없다고 하자 미술을 하는 친구가 내 손을 보더니 '컴퓨터 잘하는 손'이라고 한 적이 있다. 발도 손도 왜인지 네모 모양으로 생긴 나는 말 그대로 '똥손'이다.
이론 수업을 듣고 드리퍼에 원을 그리는 연습을 계속 했다. 몇 번이고 반복하여 원을 그리고, 다른 수강생 분과 커피를 내려 사장님과 함께 테스팅을 했다. 왜인지 텁텁한 맛. 원이 엉터리로 그려지면 편차 추출이 일어나 커피의 뒷맛이 텁텁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깔끔한 맛을 내기 위해 원 그리는 연습이 필요하다고. 다시 원을 그리고, 커피를 내려 보고, 또 다시 원을 그리고, 커피를 내렸다. 신기하게도 원을 반복하여 그리고 커피를 내릴수록 맛이 깔끔해지고 커피를 볶은 사람이 내려고 했던 '맛'이라는 것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마케팅 일은 정답이 없다고 느낄 때가 많았다. 좋은 콘텐츠를 만들어도 독자의 반응이 없으면 좋은 콘텐츠가 아닌 것이 되고, 별뜻없는 콘텐츠를 만들어도 독자의 반응이 있으면 좋은 콘텐츠처럼 느껴졌다. 그럴 때일수록 회사가 원하는 방향성을 이어가는 것이 맞는 것인가, 독자들의 반응이 즉각적으로 느껴지는 것들을 만드는 게 맞는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그런 정답이 없는 일에서 노력하면 할수록 맛이 드러나는 일을 한다는 것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왠지 이것은 정답이 있는 일처럼 느껴져서, 하루빨리 배우고 해 보고 싶었다. 그렇게 내 인생 두 번째 직업이 정해졌다. 그리고 1년이 지난 지금, 나는 원데이클래스로 갔던 그 카페에서 커피를 내리는 사람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