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내 나이 서른이 넘어갈 때쯤 결혼을 했다.
결혼식 주례를 부탁드리기 위해 나의 고교 시절 교장 선생님을 찾아뵈었다.
“교장 선생님, 잘 지내셨죠?”
“자네가 웬일인가!”
“다름이 아니라 제가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네가 결혼을 한다고? 하늘의 축복이구먼!”
“감사합니다. 선생님께 주례를 부탁드리고 싶어 이렇게 오게 됐습니다.”
“내가 주례를? 할 수 있을까? 해 본 적이 없어서…”
“교장 선생님이 제 주례를 서 주시면 영광일 것 같습니다!”
그때 당시 오랜만에 대화를 나누었는데 교장 선생님은 알 듯 모를 듯한 웃음을 지으시며 감사하게도
나의 결혼에 하늘의 축복이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그만큼 인품이 워낙 훌륭하셨던 분이라 주례 부탁을 드렸던 기억이 난다.
흔쾌히 승낙해 주신 교장 선생님 앞에서 아내와 결혼 서약을 다짐했다.
그렇게 나의 가정이 시작됐다.
어느새 지금의 나에겐 아내와 딸 그리고 아들이 있다.
우리 네 명은 닮은 듯 다른 게 너무나 많은 가족이다. 각자 개성이 너무 강해서 그런 걸까?
나의 아내는 성격이 정적이다. 운동을 좋아하거나 사교적이지는 않지만 예술과 문화, 그리고 아름다운 것들을 좋아한다.
젊은 시절, 대부분의 부부가 그렇듯 이런저런 일들을 거치며 어려운 시기도 있었음에도 차분한 나의 아내는 지금까지 그 모든 것들을 이해해 주고 참아주며 늘 나를 뒷받침해 주었다. 여전히 많은 고마움을 느낀다.
좋아하는 어느 가수가 부른 “고맙소”라는 노래를 들으며 오늘도 당신이 있어 행복하다는 말을 속으로 되뇌며 살며시 웃어본다.
나의 딸은 조금 특이하고 고집스럽다. 단순하고 보편적인 것을 싫어하는 것 같다.
아니, 어쩌면 싫어한다는 말보다 언제부턴가 딸의 자아가 뚜렷하게 형성 되어서가 아닐까 싶다.
여행을 좋아하는 나의 딸은 고교 시절부터 배낭을 짊어지고 여행을 다녔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거리와 여정이 점점 길어지는 게 아닌가.
속칭 흔한 말로 얘가 역마살이 끼었나 싶을 정도였으니까.
어느 날은 갑자기 대학 졸업을 하자마자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간다기에 꼭 가야 하냐고 물었더니
역시나 그 고집은 막을 수 없었다.
여식을 가진 아버지로서 영 마음이 편치 않았다.
딸은 결국 호주로 떠났고, 비자 기간이 끝나기 전 딸의 초대로 우리 가족은 생애 처음으로 호주와 뉴질랜드를 여행하게 되었다.
여행 후 나는 딸과 함께 한국행 비행기를 탔는데 돌아오는 내내 많은 생각들이 머리를 흔들었던 것 같다.
과연 내 딸이 어떤 삶을 원하는 걸까. 무엇을 얻으려 여기까지 이렇게 흘러온 건지 진심으로 궁금했다.
얼마 후 딸은 또다시 배낭을 짊어지고 혼자서 유럽 여행을 떠난다고 했다.
그때만큼은 진지하게 반대했다. 너무도 많은 걱정들이 눈앞을 가렸다.
그 낯선 곳에서 제 몸만 한 배낭을 메고, 그것도 여자 혼자서 말이다.
세상 어느 부모가 쉽게 허락할까. 그러나 결국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이 맞았다.
긴 여행을 마치고 무사히 딸이 귀국했을 때, 또다시 많은 생각이 교차하였다.
어쩌면 살면서 마주했던 걱정과 불안, 불합리한 생각들이 결국 나의 편견 어린 사고방식과 오래된 관념 속에서 벗어나지 못해서는 아니었을까 싶었다.
그러다 문득 여행을 좋아했고, 한때 문학 소년을 꿈꿨던 나를 닮아서는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딸과 여러 충돌을 겪었는데 그로 인해 나는 많은 것을 깨우치고 배우게 된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금전적 도움 하나 없이 떠난 딸의 여행들이 그저 존경스럽기만 하다.
무슨 배짱과 용기로 저러고 있는 걸까?
여전히 새로운 것을 찾아 헤매며 무언가를 알아내기 위해 방법을 익히고 있을,
그럼에도 삶의 무게를 혼자 해결하려 애쓰는 나의 딸이 떠오르는 날이다.
나의 아들은 조금 특이한 유형이다.
어릴 때는 너무 귀엽고 잘 생겨서 만나는 사람마다 애정 가득한 말을 많이 들었던 아이다.
대부분의 부모가 그렇듯 자식에게 뭐든 해주고 싶은 마음만큼은 나 또한 있었던지라
운동, 미술, 음악 등 여러 학원을 보냈던 것 같은데 하기 싫다는 말이 나오면 나의 아내는
‘그래 그러면 그만 다니렴.’이라는 말로 상황을 마무리 짓고는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초등학생이던 아들이 학교에 가기 싫다고 했나 보다.
아내는 여느 때처럼 ‘그래 가지 마라’라는 말로 대응했고, 아들은 정말로 그날 학교에 가지 않았다.
가지 말라는 엄마와 그렇다고 진짜 가지 않는 아들 중 누가 문제였을까?
나에겐 두 사람 다 특이할 뿐이다.
지금까지도 둘의 대화는 이렇게 흘러오고 있다.
여전히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를 때가 많지만 요즘은 그저 웃어넘길 뿐.
중학생이 된 아들이 수학여행을 다녀오는 길에 웬일로 한 권의 책을 사 왔는데 ‘잡학 박사’라는 제목이었다.
생뚱맞게 이런 책을 다 사 왔구나 싶어 흥미로웠다.
사실 우리 가족 중에서 여전히 잡학으로는 1등일 정도로 똑똑하다.
본인 말에 따르면 잡학으로 시험을 봤으면 우리나라에서 원하는 대학교를 골라서 갔을 거란다.
말을 참 잘하는 녀석이다.
화도 잘 내지 않는 데다 느린 것 같은데 침착하고, 차분한데 생각이 너무 많다.
그래도 믿음직스럽게 자라줘서 고맙다.
+ 나의 딸과 아들에게.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며 스스로 삶을 찾아가려는 너희들에게 끝없는 응원을 보낸다.
비록 그 길을 가며 때로는 힘들고 어려워도 멈추지 않고 한 발 한 발 내딛다 보면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해 나갈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길 거야.
나 자신을 믿고,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면 된단다.
지금을 충실히 살아간다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성장하고 있을 테니.
세상의 모든 일에 답이 하나가 아니듯 수많은 길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내가 걸어가면 그것 또한 길이 되지 않을까?
때로는 답이 없다고 주저앉지 말고 돌아서서 다른 길로 걸어가는 것도 괜찮아.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열정을 잊지 않는 삶을 살았으면 하고,
아무것도 이룬 게 없다고 좌절하기보다 지금의 자신을 인정하고 존중해 주며 살아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