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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용재 Nov 01.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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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방은 나와 눈이 마주치더니 이내 고개를 숙여 버린다. 몇 초 동안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할머니 잘 먹었습니다. 다음에 다시 올게요"라는 말을 하고 가게를 나왔다. '저 사람도 이 식당을 알고 있었나 보네' 눈이 마주쳤을 땐 나도 모르게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하려고 했지만 상대방의 그런 태도에 반가움 마음은 어딘가로 사라져 버린다. 골목길을 걷는 사이 길고양이 한 마리가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 모습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용히 골목길을 걸어 나아간다. 고양이를 지나쳐 몇 걸음 나아가 뒤를 바라보자 여전히 나를 의식하지 못한 것인지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 시선을 따라간 곳에는 다른 길고양이 한 마리가 담장 위에 앉아있다. 

횡단보도를 건너기 전 카페에 들러 음료를 주문하기로 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언제나 그렇듯 웃음을 드러내며 나를 반겨준다. "안녕하세요"라는 말을 하자 나와 눈이 마주친 직원은 가벼운 눈인사로 답한다. "늘 먹던 걸로 드리면 될까요?"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먼저 "우유는 두유로 변경하시는 거 맞으시죠?" 기억해주고 있다는 것에 대한 고마운 마음 사이로 웃음을 지어 보인다. " 네 맞아요. 시럽은 빼주시고 디카페인으로요." 상대방 역시 그 마저도 당연히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음료가 완성되기 전까지 근처에 서 기다리기로 했다. 핸드폰에 고개를 숙이고 있을 때 다른 직원분은 내게 다가와 "새로 나온 케이크인데요. 한번 드셔 보세요" "감사합니다." 맛이 아주 좋았다. 다음에는 한번 사 먹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윽고 직원은 나를 떠나 다른 이들에게 똑같은 행동을 취하고 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사이, 음료가 완료됐다는 알림이 울린다. "감사합니다." 횡단보도 앞에 서 신호를 기다리는 사이 경적을 울리며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오토바이가 보인다. 오토바이가 막 지나가는 순간 신호는 초록불로 뒤바뀐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는 민지 씨와의 일들이 떠올라 신호를 건너지 못한 채로 그 자리에서 굳어버린다. 마치 오늘의 일들이 일어날 것을 일 년 전 미리 겪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단, 상대방만은 존재하지 않은 채로. 

의자에 앉기 전 나뭇잎을 손으로 털어본다. 그리고 하늘을 올려다보자 큼지막한 나무에서는 여전히 나뭇잎이 하나둘 떨어지고 있다. 가을이 오려나 보다. 

여름이면 푸르름을 드러내던 것들이 가을이 되면 저마다의 색으로 물들어간다. 한 번이 아닌 매년 계절이 바뀔 때마다 반복되는 일이다. 어쩌면 나무는 매 순간을 그렇게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떤 순간도 게으르지 않고 저마다의 모습을 충실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말이다. 

나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계절에 따라 변하는 사람일까. 아니면 그저 하나의 모습에 불과할 뿐일까.

민지 씨의 모습 안에는 여러 계절이 한꺼번에 공존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매 순간 다른 매력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문득, 우리가 자동차 극장에 다녀와 갔었던 호수공원의 일들이 떠오른다.

"지금은 곁에 없지만 어릴 적 고양이 이름이 '젤리'였어요." 이름이 왜 '젤리'가 된 것인지. 어째서 마지막까지 함께 하지 못한 건지. 마지막 순간까지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더니 민지 씨는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혹시 실례가 안된다면 고양이 이름을 '젤리'로 지어줘도 될까요? 아직 이름을 정해주지 못했거든요." 

나는 물론이라고 말했다. " '젤리'도 길 고양이었는걸요. 아마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던 친구가 같은 이름을 가지게 돼었다는 것을 알면 분명 기분 좋아할 거예요" 

또 다른 젤리는 지금 잘 지내고 있을까. 일 년쯤 시간이 지났으니 이제는 제법 자랐을지도 모르겠다. 

이따금 친구들과 만나는 자리에서는 가상 데이트에 대한 이야기들이 심심치 않게 나오곤 한다. 아마도 우리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겪게 될 세대일지도 모른다고. 어떨까. 민지 씨 역시 친구들과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까. 그러다 내 생각을 한 번씩 하곤 할까. 사실 아직도 궁금하기만 하다. 나의 데이터를 보았을 민지 씨의 심경은 어땠을까.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긴 했을까. 

역시, 공원에 와서 앉아 있으면 나도 모르게 많은 생각들을 머릿속에서 꺼내고만 낸다. 그만큼 편안하게 느껴지는 장소이기 때문인 것 같다. 벌써 한 시간을 가만히 앉아 보냈다.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대로 가기에는 아쉽기 때문에 한 바퀴 크게 돌아 집에 가기로 했다. 귓가에서는 이어폰 너머로 영화의 배경음악이 흘러나오고 있다. 며칠간의 만남을 뒤로하고 연락처도 없이 헤어지던 그들은 몇 개월 뒤 재회를 하자는 약속을 한다. 같은 장소에서. 어쩌면 약속을 하는 순간에도 두 사람 모두 불가능한 일이라고 느끼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우리는 때때로 불가능한 것들에 도전하고 싶어 한다. 설령, 그것이 이루어지든,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그것은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 순간에 가져본 감정에 충실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기 때문이다. 이런 나의 생각마저도 기우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그들은 정말 재회를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얼마 되지 않는 서로의 기억을 더듬는 일이 아니라, 그 이후로 펼쳐질 수많은 날들 앞에서 서로의 기억들을 차곡차곡 채워나갈 수도 있다. 어느 한쪽이 물러서지 않는다면 그래서 두 사람 다 앞으로 나아가길 원한다면. 그들은 분명히 만났을 것이다. 영화의 결말은 열린 결말로 써 끝을 맺고 말아 버린다. 어느 누군가는 그런 결말에 아쉬움이나 허탈함을 드러낸다. 그렇지만 때로는 이런 결말로 남겨둠으로써  각자의 바람대로 결말을 맺어 가는 일이 더 좋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런 결말들을 삶에 적용시켜 나아가기 때문이다. 

여전히 주변 사람들은 내가 누군가를 판단하는 기준이 엄격하고 겉모습에 치중되어있다고 생각한다. 그도 그럴 것이 여전히 똑같은 말들을 함으로써 누군가를 만나기 주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민지 씨를 만나고 난 뒤 달라졌다는 것이다.

화려한 포장지로 싸인 마음이 아닌, 날것 그대로 드러낼 수 있는 마음 같은 것들로.

살아오는 날들이 모두 그런 것 같다. 

강한 부정을 더해낼수록 기대를 하지 않겠다 할수록 오히려 더욱 깊이 빠져버린다는 것을. 

공원의 입구가 보이자 발걸음이 빨라진다. 많은 사람들을 지나쳐 입구를 막 벗어났을 때, 나도 모르게 인사를 하고 하고 말았다. "안녕하세요. 아까 식당에서도 뵌 것 같은데 여기서 또 뵙게 되네요." 상대방은 무방비 상태에서 공격이라도 당한 듯 심하게 놀라는 모습을 보인다. "아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인사를 하고 말았네요. 놀라게 할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기분이 나쁜 걸까. 별다른 말도 반응도 하지 않는다. "시간을 방해했다면 다시 한번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럼 가 보도록 할게요." 자리를 벗어나려고 하자 상대방은 말을 이어나간다. "아니에요. 저도 식당에서 마주쳤을 때부터 알아봤어요. 인사를 해야 할까 하다가 고개를 숙이고 말았어요. 이렇게 인사를 먼저 해주셔서 놀랐을 뿐이에요." 기분이 나빴던 게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자 그제야 안도감이 밀려든다. "아 아니에요. 그럴 수도 있죠. 저 같아도 그랬을 텐데요. 바람이 시원해요." 그러자 상대방은 익숙하다는 듯 "맞아요. 저도 늘 저쪽 의자에 앉아서 시간을 보내요" 말을 하며 손으로 의자가 있는 방향을 가리킨다. 내가 앉아있던 장소다. "어, 저도 저의자에 앉아서 시간 보내기를 좋아하는데 똑같네요." 그러자 상대방은 무심결에 나온 자신의 말과 행동에 놀란듯한 반응을 보인다. 그 모습을 보고는 "더 이상 시간 뺏으면 안 되겠네요. 그럼 저는 먼저 가보도록 할게요. 산책 잘하세요"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마찬가지로 나에게 가볍게 인사를 한다. 생각할수록 낯설지 않은 여자 같다는 생각이 든다. 뭐랄까. 정말 몇 번을 마주쳤기 때문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것 같은 그런 기분이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생각이겠지만 말이다. 처음 본 사람을 단번에 기억해내는 나로서는 방금 마주했던 사람은 단지에서 부딪힌 순간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이 확실하다. 그럼에도 왠지 모르게 드는 익숙함이란 감정은 설명할 수가 없다.

집으로 돌아온 뒤에는 소파에 누워 잠시 쉬자고 생각하던 일이 그대로 잠에 들고 말았다. 커튼을 열고 창밖을 바라보자 바깥은 이미 저녁이 되어 있다. 밥을 먹기 위해 냉장고를 열어 반찬들을 꺼냈다. 익숙한 자세로 리모컨의 전원 버튼을 누른다. 밥을 먹을 때면 느껴지는 적막은 늘 익숙해지지 않을 뿐이다. 뉴스에서는 여전히 연애 정보회사에 대한 사건을 다루고 있다. 

"사건이 터지기 이전, 피해를 겪은 회원들에게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제가 듣기로는 문제가 터지기 이전 즉 그러니까. 아주 활발히 사업 진행이 되고 있을 당시 황당한 경험을 하셨다고요?"

"네 안녕하세요. 가상 데이트를 통해 상대방이 마음에 들어서 실제로 만나자는 말을 했고 상대방도 수락을 했기 때문에 약속시간을 정해 장소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십 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앉자 연락을 했더니 상대방은 이미 도착해있다는 말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제가 구석 쪽 자리에 앉아있어 알아보지 못했던 것인가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두리번거렸죠. 그런데 제가 만났던 분의 모습이 보이지 않더라고요. 이상하다 싶은 생각을 하고 자리에 앉아 전화를 하려고 하는데, 처음 보는 분이 제게 인사를 하더라고요. 그래서 누구시냐고 물었더니 자신이 그 사람이라는 말을 하더라고요. 저는 황당할 수밖에 없었죠. 한눈에 보기에도 제 이상형과는 전혀 거리가 멀게 느껴지는 분이었으니까요. 뭐, 그날은 이미 약속을 잡았던 것이기 때문에 그럭저럭 시간을 때우고 돌아와 회사 측에 항의를 했더니 사과를 하면서 프리미엄 서비스를 제공해 줄 테니, 이점을 비밀로 해달라고 하더라고요."

"그럼 이제 와서 그런 일들을 밝히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회사 측 대표의 주장을 보고 부끄럽지만 사실을 말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문제가 발생되는 시점은 기사가 터지기 직전이 아닌 그 이전부터 있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나 역시 민지 씨와 실제로 만났더라면, 겉모습과 다른 누군가의 모습에 실망을 더하게 되었을까. 그 당시의 나라면 어떤 선택을 내리게 되었을까. 이렇게 되어버린 일이 우리에겐 최선이었을까.

다음 날은 어제 갔던 식당에 다시 찾아가기로 했다. 맛이 좋았던 것도 사실이지만, 민지 씨가 말해준 대로 식당의 메인 메뉴는 매일 바뀌기 때문이다. 식당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할머니는 나를 알아보는 듯 반갑게 인사를 해준다. "안녕하세요. 어제 너무 맛이 있어서 또 찾아왔어요. 식혜 생각도 계속 나더라고요" 할머니는 나의 말에 뿌듯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그래, 잘 왔어. 내가 만든 식혜는 밖에서 파는 것 하고는 천지차이지." 맞장구를 치며 자리에 앉았다. 할머니는 반찬을 놓는 사이 마음껏 먹으라며 식혜가 담긴 병을 함께 올려둔다. 그 모습에 할머니를 바라보자 "걱정 마. 식혜 값을 따로 받는 일 없으니까. 맛있게 먹어주고만 가."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어제도 느꼈던 생각이지만 오늘은 더 확실하게 느껴진다. 반찬을 하나씩 먹을 때마다 어릴 적 보낸 할머니 집에서의 일들이 떠오른다. 할머니가 아직도 내 곁에 있었더라면 이런 식으로 나를 대해줬을 것이다. 나이가 들어도 나를 부르는 호칭은 여전히 '강아지'라고 하던 할머니의 모습이 선명하게 남는다. 

밥을 먹고 계산을 하려고 기다리는 사이 할머니는 잠깐 기다려 보라 말하며 주방 안으로 들어간다. 그러더니 식혜가 담긴 병을 들고 나온다. "맛있게 잘 먹던데, 챙겨가 집에 가서 심심할 때마다 먹어." 나는 아니라며 손사례를 쳤다. "할머니 정말 괜찮아요." 우리는 몇 번의 실랑이를 반복했다. "그럼 살게요. 할머니 공짜로 받아갈 순 없잖아요." 할머니는 나의 등을 내려친다. "이건 파는 거 아니야, 내 가게 오는 손님들 줄려고 만든 거니까. 나 팔 아프게 하지 말고 어서 받아가" 못 이기는 척 식혜를 받고 나오며 그럼 거스름돈은 다음에 주세요 하고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올려두고 가게를 나와버렸다. 할머니는 나를 따라 삐걱거리는 문을 열고 나오더니 나의 등 뒤에 대고 "아이고, 민지랑 하는 짓이 똑같네"라는 말을 한다. 재빠르게 걷던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네? 할머니 방금 누구랑 같다고요?" 할머니는 왜 그러냐며 "민지. 어제도 만났잖아, 총각 지갑 찾으러 왔을 때 밥 먹고 있었는데 기억 안 나?" 순간적으로 누군가 나의 머리를 내려치는 기분이 들었다. 그 자리에서 몸이 굳어버린다. 할머니는 그런 나에게 다가와 주머니에 잔돈을 찔러 넣어주고는 "잘 가"라는 손짓을 하고 가게 안으로 다시 들어간다.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으로 강한 파도가 치듯 밀려들어온다. 그동안 계속해서 마주친 여자가 민지 씨라고..?

그 후로 일주일 동안은 퇴근길에 식당에 찾아갔다. 일주일의 마지막 날에는 "할머니 오늘은 민지 씨라는 분 찾아왔어요?" 할머니는 의아한 듯이 "둘이 아는 사이야? 뭘 그렇게 찾아. 저번에 총각 하고 마주친 날. 식당을 나가면서 몇 개월 동안은 지방에 내려갈 일이 있어서 못 온다고 했어." 나는 아쉬운 마음을 숨긴 채로 "아 그랬군요. 알겠습니다. 오늘도 정말 맛있게 먹고 가요 감사합니다." 

그 후로 반년이 흘렀다. 

매서운 추위가 대지를 잠재우는 동안 공원에 나가는 일은 잠시 동안 멈추기로 했었다.

일기예보에서는 "드디어 추위가 한풀 꺾이고 한낮부터는 따스한 햇살을 마주하겠습니다." 

옷을 챙겨 입고 아파트 단지를 나섰다. 겨울 동안 하얗게 변해있던 나무들은 다시금 초록색의 잎들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역시 따뜻한 게 최고구나.' 걸을 걷는 사이 자연스럽게 기지개를 켰다. 

시선은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며 관찰하기 바쁘다. 공원을 가는 길에는 동물병원이 하나 있다. 그곳을 지키는 고양이 한 마리가 있는데 창가 쪽에 올라앉아 햇살을 쬐는 모습이 귀여워 먼발치에서 한참을 쳐다보다가 가곤 한다. 오늘도 그곳을 지나가는 길에 잠깐 고양이를 보고 가기로 했다. 안에서는 손님을 맞이하는 것인지 분주해 보인다. 그리고 고양이는 여전히 햇살을 받으며 가만히 누워 있다. 잠시 동안 그 모습을 보고 손인사를 하자 고양이는 심드렁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또 올게. 안녕" 뒤돌아 서 돌아가려고 하자 동물병원의 열린 문 사이로 고양이 한 마리가 뛰어나오더니 나에게 다가온다. 방금 전까지 마주하던 고양이는 아니었다. 화들짝 놀라 고양이를 바라보자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포도'였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확실히 더 많이 자란 모습이었지만, 분명히 '포도'였다. 이마에 선명한 줄무늬는 여전했기 때문이다. 나는 포도를 안으며 말했다. "정말 '포도'야? 도대체 그동안 어디서 지낸 거야? 내가 얼마나 찾았었는데, " 안에서는 누군가 '포도'를 쫓아 나왔다. 고개를 들어 누군가를 바라보자 나의 몸은 일제히 굳고 말았다. 그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민지 씨." 상대방은 내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에 대해 크게 놀란 듯했다. 안에서는 다른 고양이 한 마리가 울고 있다. 그러자 그녀는 " '젤리' 잠깐만 기다려." 그 말을 듣는 순간, 모든 생각들이 일제히 퍼즐을 맞추며 확실해졌다. "민지 씨 맞죠?" 상대방은 몇 초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어째서 '포도'가 민지 씨랑 함께 있는 거고, 민지 씨는 이 동네에 왜 있는 거예요? 그리고 저를 처음 본 순간 왜 아는척하지 않았어요? 내가 당신이 만났던 사람이라고." 순식간에 여러 질문이 던져진다. 상대방은 무엇부터 말해야 할까 고민을 하더니 하나씩 이야기를 꺼내간다. "용재 씨의 데이터를 받는 순간. 저 역시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밀려들었어요. 그런데 뭐랄까, 주저하게 되더라고요. 고민을 하는 사이 그 일이 터지고 회사 측에서 연락이 왔어요. "김민지 회원님과 가상 데이트를 체험한 김용재 회원님 간에 오류가 발생해 타인의 모습이 제 데이터에 씌워졌다고. 그리고 잠정적으로 일이 중단되었다고." 여전히 민지 씨를 바라본다. "그 일을 겪고서 한동안은 많은 생각을 했어요. 물론 용재 씨를 만날 수 있는 방법도 없었지만, 저는 그 후로 우리가 보냈던 장소들에 혼자서 찾아가 보곤 했어요. 이대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 작년에 이사를 왔어요. 혹시나 용재 씨를 마주칠지도 모르니까요. 그런데 막상 그토록 바라던 일들이  현실로  일어나니까. 저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요. 혹여나 나의 본모습을 보고 실망을 하지는 않을까 하면서요." 나는 이대로 있을 게 아니라 우선 걸으며 이야기하자고 말했다. 각각의 가방 안에 들어간 고양이들은 고개를 내밀며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그럼 어떻게 '포도'가 민지 씨와 함께 있었던 거죠?"

"이 동네로 이사를 오고 얼마 지나지 앉을 때였어요. 누군가 해를 입힌 건지 고양이 한 마리가 풀숲에 쓰러져있더라고요.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서 바로 병원에 데리고 갔죠. 그날. 우리가 처음 단지 안에서 마주친 날도 동물 병원에서 연락이 와서 급하게 가는 길이었어요. 그런데 이 고양이가 용재 씨가 돌보던 길고양이 인 줄은 전혀 몰랐어요" 

가만히 민지 씨의 얼굴을 바라봤다. 내 기억 속에 남아있던 외형과는 분명 다른 사람의 모습이었지만, 목소리며 행동이며 모든 게 민지 씨의 모습이다. 민지 씨는 그런 나를 보며 "아무튼 많이 놀랐죠? 이런 식으로 밝히고 싶은 생각은 없었는데.." 

그 말을 듣고서 나는 화제를 돌려 말했다. "할머니. 식혜가 아주 맛있던데 우리 같이 밥 먹으러 가요. 함께 오는 모습을 보면 많이 놀라시겠죠?. 그리고 고마워요. 저 대신 '포도'를 지켜줘서"

고양이 두 마리의 경쾌한 울음소리가 우리 사이로 파고든다.

공원을 나가는 사이,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우리의 볼을 스쳐 지나간다.

'아 정말 봄이 찾아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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